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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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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게 내버려두는 ‘생명권력’ 미셸 푸코는 감옥, 군대, 병원, 학교를 근대의 상징 공간으로 봤다. 감옥은 이들 공간의 특징이 응축된 정점이다. 중세의 형벌이 주로 공개 처형 같은 신체형이었다면 근대의 형벌은 형기를 채우게 하는 구속형이다. ‘교도소’라는 이름에도 나타나듯, 구속형의 명분과 목적은 규율의 내면화에 있다. 감옥, 군대, 병원, 학교는 하나같이 규율을 가르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병원이 유독 튄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이라는 소년체전 구호를 보자. 개인의 건강한 신체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사회의 것이기도 하다. 근대 ‘규율권력’에 ‘신체건강’과 ‘품행방정’은 실과 바늘 같은 노동자 규범이며, 의료 행위는 그런 노동자를 공급하기 위한 조처의 일부다. 그럼에도 끝내 규범에..
기자 촌지 전봉민 국회의원(부산 수영구)과 전광수 이진종합건설 회장 부자에 관한 의혹은 부산 지역 건설업체 사주 일가가 1조원 가까운 분양 수익을 챙기는 과정에서 지역 정치권이나 관료 사회와 불법·탈법으로 어떻게 얽혔느냐가 핵심이다. 그러나 (MBC)의 보도(12월20일)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전 회장이 기자에게 3천만원의 ‘촌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당사자의 육성이 생생히 살아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기자 촌지에 관한 직접적인 보도가 그동안 워낙 희소했던 탓도 컸을 터이다. 기자 촌지는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언론에 그 실상이 ‘팩트’로 보도된 건 1991년 11월1일치 ‘보사부 기자단 거액 촌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처음이었다. 그해 추석을 전후해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기자단이 재벌 ..
기자 양반, 인생 왜 그렇게 살았소 어느 아랫녘 말씨에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탁성이 내려앉은 남성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성을 냈다. 다주택자 중과세를 주장한 그날 사설을 따지는 거였다. “서울 사는 자식들 주려고 강남 아파트 두 채 산 게 죄냐. 나 같은 서민이 세금 낼 돈이 어딨냐”고 했다. 세금은 벌금이 아니다, 실거주자인 자식들더러 내게 하시라 했더니 “자식들도 변변한 직업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속을 왜 몰라주느냐는 듯 대뜸 물었다. “기자 양반도 세금 낼 거 아니오?” 전셋집에만 살아 재산세 낸 적이 없다 하니, 이번엔 “청약에서 계속 떨어진 거냐”고 물었다.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짜 대답했다. 청약저축에 가입해본 적이 없노라고. “아니,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았소?” 이 질문은 2020년이 저물 때 ‘내가 들은 ..
시적 정의와 법치주의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은 전공이 철학과 문학인데, 1994년부터 이 대학 로스쿨에서 고전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강의를 했다. 그 강의에서 영감을 얻어 쓴 책이 (Poetic Justice)라는 명저다. 시카고대에서 미래 법률가들에게 문학 강의를 한 건 누스바움이 처음은 아니다. 1970년대 초부터였다고 하니 유서가 깊다면 깊은데, 우리에게는 몹시 낯설기만 하다. 법대나 로스쿨 강의실이라면 법리에 정통한 석학, 가령 70년대 미국 드라마 에서 입꼬리가 고집스럽게 처진 킹스 필드 교수가 학생들의 논리적 빈틈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풍경이 떠오른다.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 디킨스를 읽는 누스바움 강의의 풍경은 사뭇 대조적이다. 밤잠 내쫓으며 법전을 외워야 하는 미래 법률가들에겐 부질없는..
수어, 모두를 위한 손짓 코로나19가 ‘뉴노멀’(새로운 표준) 행세를 하는 탑탑한 현실 위로 또 하나의 청량한 뉴노멀 하나가 자리 잡았다. 수어 통역이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지난 2월4일 브리핑 때부터 수어 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19 정보에서 농인(청각장애인)이 소외와 차별을 받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뒤였다. 지금은 중앙정부는 물론, 광역과 기초 지자체의 어느 브리핑에서나 수어 통역을 볼 수 있다. 시각적으로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수어 통역자가 발표자 옆에 나란히 선다. 과거에는 무대 바깥에 멀찍이 떨어져 섰다. 통역자의 대등해진 위상은 상징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화면 속 통역자의 손짓이 예전보다 훨씬 크게 보이게 됐다. 수어는 시각 언어다. 크게 보일수록 소통에 유리하다. 화면 한 귀퉁이에 더부살이하듯 비..
국회의사당에 원전을 짓자 경북 경주시 월성원전 1호기 앞 바닷가에 ‘지진해일 대피 안내판’이 서 있다. 경주/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는 수소전기차 충전소가 있다. 지난해 9월에 들어섰다. 수소전기차 충전소는 대표적인 기피시설이다. 정부의 목표는 지난해까지 전국 89곳에 설치하는 것이었으나, 주민 저항이 심해 여태 37곳에 머물러 있다.(8월 말 현재) 그런 기피시설이 지체 높은 국회 안에 설치돼 있으니 상징하는 바도 각별하다. 국회는 여염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나랏일 하는 이들은 사사로운 이유를 앞세워 공공시설을 기피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지 않은가.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 세종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압도적 다수 여당의 뜻이니 실현 가능성이 작아 보이지 않는다. 국..
이건희 회장의 슬기로운 신문 생활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을 기리는 대다수 신문의 영웅서사는 길고 곡진했으나, 또한 천편일률로 밋밋하고 납작했다. 고인 생전에 매서운 글맛 한번 보여준 적 없는 터에 사후라고 뭘 더 기대할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딱하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들의 일편단심과 달리, 생전의 ‘임’은 이들의 서열을 살뜰히도 챙긴 듯하여. 중앙, 조선, 동아, 한국경제, 서울경제, 매일경제, 한국, 서울, 국민, 한겨레, 경향…. 이 회장에게 아침마다 오른 조간 스크랩의 순서다. 중앙이야 자기 신문이라 여겨 앞세웠을 테고 한겨레와 경향은 멀리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겠으나, 경제지의 순서를 정한 기준은 짐작하기 어렵다. 스크랩을 만들어 올린 곳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커뮤니케이션팀이었다. 그러나 세계 아이티(IT) 산업을 선도한다는 ..
김진숙의 두 목소리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 지도) 목소리에는, 메시지와 별개로 듣는 이의 가슴에 긴 사이클의 울림과 초단파의 각성을 동시에 남기는 파장이 있다. 에이엠(AM) 주파수와 에프엠(FM) 주파수의 특성이 한데 어우러진 듯한 형질이다. 2011년 여름 ‘희망버스’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가서 처음 들은 지상 35m 타워크레인 위의 연설은, 분명 사람의 소리를 넘어서는 소리였다. 수없는 망치질과 담금질로 단련된 금속성의 쩡쩡한 울림이 또렷했으나, 그것은 또한 물질의 소리를 아득히 넘어서는 소리였다. 그해 내가 매번 희망버스에 오른 데는 그 소리의 이끎에 몸을 내맡긴 면도 없지 않았다. 그의 몸속에는 목소리와 관련된 비해부학적인 기관이 있을 거라고 지금도 상상한다. 비해부학적이라면 태생적이 아닌 생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