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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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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지기 신소1의 결혼에 부쳐 2023년 7월8일 신소1 결혼식에서 읽은 편지입니다. 실제로 읽었을 때는 슬랩스틱 신파 장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생애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신비의 소녀 1호, 줄여서 신소1에게 너한테서 결혼할 결심을 처음 들었을 때, 뛸 듯이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네가 그 선택으로 인해 지금 행복하고 또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면 족하다고 여기려 했다. 아빠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 같아야 할 터였다. 그렇지 못했다. 컴컴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에 빠져들고는 했다. 이 편지는 네 결혼을 앞두고 아빠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태를 해석하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이다. 뙤약볕에 오래 졸인 바닷물이 허공으로 흩어진 뒤 시나브로 소금이 오듯이, 아빠는 이제야 겨우 쓰기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부치지 못한 편지-김만배 돈거래 사건에 부쳐 편집국 고위간부의 김만배 돈거래 사건으로 신문사 내부가 큰 혼란에 빠졌을 때 고심을 거듭해 쓴 글인데, 끝내 발표하지 못했다. 일기처럼 기록으로 남긴다. 논설위원실에서 일하는 안영춘입니다. 엄혹한 시기에 동료 여러분께 글을 띄웁니다. 제가 대단한 탁견이나 평정심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저도 서글프고 두렵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고 눈앞이 아득합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말길을 열려고 먼저 나서지 않으면 이 무겁고 단단한 침묵의 결계가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실명으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모든 제 글에 바이라인을 붙이면서 이 글만 예외로 할 명분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비판이면 모를까, 말 걸기이자 나름 참회록이기도 한 글이 익명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악몽이어도 좋으니 부디 꿈이기만 했으면 하고..
다낭 여행객에게 전하는 조금 불편한 이야기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유력한 개최지 후보로 떠오른 베트남 다낭은 요즘 한국사람들에게도 최고의 ‘핫플레이스’다. 올 상반기 전자상거래업체 항공권 예약과 여행사 관광상품 예약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인구 대비 출국률 세계 1위(연간 50%대)인 한국은 다낭의 외국인 여행객 순위에서도 당당히 1위에 올랐다.인터넷을 검색하면 다낭을 찬미하는 기사와 블로그 포스트가 쏟아진다. 몇개만 골라 읽어도 반쯤은 여행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러나 여행 기사나 블로그에선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알고 나면 여행하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을 얘기가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얽힌 현대사의 붉은 한 조각이다.다낭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의 주요 사령부와 기지가 밀집한 곳이었다. 수려한 풍광을 끼고 미군 휴양지도 ..
김진영 선생님 추도사 지난 8월21일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의 추도식에서 읽은 추도사입니다. 여기 계시는 많은 분들에 비하면 저는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만남의 시간이 길지 않았습니다. 2014년 봄에 처음 뵀으니 만 4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자주 뵌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억을 긁어모아 봐도 10차례가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도의 말씀까지 하게 됐습니다. 외람된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길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드리는 말씀은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무람없이 서게 된 이유를 밝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건 공교롭게도 죽음에 관해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두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무려 삼백이 넘는 생명의 희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분노와 ..
그동안 고마웠습니다-기키 기린을 추모함 일본 배우 기키 기린이 얼마 전 타계했다. 그녀의 연기에 깊이 매료돼 있었으면서도 그녀가 십수 년 암으로 투병해온 사실은 부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영화 속 페르소나에 몰입해 개인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사시(斜視)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본 적이 있는데, (이하 )를 보면서 그게 실제 장애인지 아니면 연기인지 궁금해서였다. 2003년 왼쪽 눈의 망막이 박리돼 실명하면서 그리됐다고 한다. 2015년 작품인 은 기키의 필모그래피에서 비교적 근작이다. 이전 여러 작품에서 그녀의 장애를 알아채지 못한 사정을 내 관찰력의 한계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키만의 고유한 연기에서 이유를 찾는 게 더 설득력이 클 거라고 생각한다. ‘메소드 연기’는 배우가 배역과 완벽한..
‘손석희’로 본 언론의 낯선 초상 손석희 앵커와 나 사이의 격차(차이가 아니다!)를 꼽으라고 하면 금세 백 가지도 넘게 댈 수 있겠지만, 이태 전의 사건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설명하고 남지 않을까 싶다. 2015년 4월 어느 날, (JTBC)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기자와 전화로 나눈 대화 목소리를 메인뉴스 시간을 통째로 털어 내보냈다. 날이 밝은 뒤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은 지면에 대화 전문을 공개하려고 이미 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에게 분석을 맡긴 녹음파일을 가 중간에서 입수했고, 유가족의 반대까지 무릅쓰며 ‘시간차 단독보도’를 감행했다. 손 앵커는 보도 다음날 같은 뉴스에서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강조했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는 알지 않아도 될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지 ..
욕실 청소, 그 특수함에 대하여 -5월8일, 참나무씨의 어떤 하루 가사노동에서의 평등은 다음 두 가지가 달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성별분업의 폐지. 둘째, 일의 합리적인 분담. 성별분업이란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남성이 해서는 안 될 일과 여성이 해서는 안 될 일을 금기로서 못 박은 것이다. 여기에 노동의 장소가 가부장제의 집 내부로 옮겨지면 다시 남성이 해서는 안 될 일로만 국한되는데, 그것은 애초 가사노동이 여성만의 ‘의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뭐든지 해야 하는 반면, 남성은 예외적으로 해주는 것이고, 내키지 않으면 그마저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별분업의 폐지는 (성)평등한 가사노동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성별분업이 폐지돼도..
“처사님, 글로 성불하세요” 봄날, 법랍 17년 비구니 누님과 나눈 공부·수행 이야기 먼발치로 봐도 낯빛이 환하다. 하기야, 화창한 4월 초 오후 2시 만개한 벚꽃 아래 아닌가. 아니면 몇 해 만에 만나는 혈육이 반가워서일까.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장삼 자락 팔랑이며 작고 다부진 몸피의 비구니가 재게 다가온다. 파안대소로 드러난 큰 앞니에 봄 햇살이 튕겨 자잘하게 부서진다. 한발치 떨어져서 서로 합장하는데, 산보 나온 이들이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순간 표정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럴 수밖에. 그녀가 대학생이고 내가 고3일 때, 제주도 여행을 떠난 부모 대신 학부모 상담을 하러 학교 언덕길을 오르는 그녀를 교실 창가의 급우가 발견하고는 이렇게 외쳤다. “야, 저기 여자 안영춘이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처사님. 속가로 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