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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05 부동산과 에어컨

부동산과 에어컨

발표글 2016.09.05 16:26 Posted by 지독한 정상

일산 신도시 곁에 별책부록처럼 조성된 단출한 주거지역에서 18년째 살고 있다. 이사 온 날 밤 달디 달았던 공기와 형형했던 별빛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엔 직장 동료들이 제법 많이 살았는데 일찌감치 떠나고, 지금은 두어 집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이 간 곳은 예외 없이 서울의 학군 좋은 지역이었다. 나는 전세 계약이 끝나도 같은 단지 안에서만 옮겨 다녔다. 평수가 가장 작은 단지여서 보증금이 싼 탓도 있었지만, 단지 곳곳에 우거진 나무들에게도 미련이 컸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삼매경에 빠진 나. 신도시 언저리에서 언제까지고 저런 모습으로 살고 싶었던 나는, 이제 전세 난민이 되어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다. 신소2 그림


이제 나도 떠날 때가 되었다. 이곳만큼은 부동산 광풍의 무풍지대라 여겼는데, 올 들어 집값이며 전셋값이며 한두 달 만에 1천만 원씩 뛰고 있다. 이사 갈 곳을 찾아 열심히 인터넷을 뒤진다. 지금 사는 데보다 더 외진 지역들이다. 그럼에도 더 작은 평수를 찾아야 하고, 그러고도 몇 해 모은 돈에 대출까지 받아야 할 것 같다. 전국에 상시 폭염 특보가 내려졌던 지난여름 한반도를 보는 듯하다. 부동산업자가 말했다. “집을 사놨으면 큰돈 버셨을 텐데.” 가슴속에 뜨거운 모래바람이 일었다.


직장 동료들과 밥 먹는 자리에서 사정을 얘기하면 다들 제 일처럼 걱정한다. 개중엔 옛 이웃도 더러 있다. 왜 지금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야 하는지, 어떤 방법들을 총동원하면 살 수 있는지 무용담까지 곁들여 조언을 하지만, 내 귀엔 이해는 하되 직접 풀 수는 없는 수학 미적분 문제처럼 들릴 뿐이다. 듣다 보면 심사가 뒤틀려,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에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를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게 다 선배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고 있는 거야.”


갈비에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설렁탕집 여주인에게 욕을 해대고 자책하는 시인 김수영(‘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심정이 되어 다시 생각해본다. 동료들이 불로소득을 노리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맹모삼천지교가 교육철학을 넘어 절박한 생존술이 된 이 시대에, 그들은 낙오하지 않으려고 컨베이어벨트에 올라 탄 죄밖에 없다. 차익을 얻는 것도 복불복이고, 그래봐야 집 한 채로는 숫자상의 이익일 뿐이다. 다들 제자리다. 무리해서 집 사는 걸 투기라고 여겼던 나만 뒷걸음질 쳤다.


이제 집값 내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정부의 초저금리 정책, “이럴 때 안 사면 앉아서 손해 본다”며 겁을 준 건설자본과 언론의 집요한 공포 마케팅은 결국 코흘리개부터 요양병원 노인까지 국민 일인당 3360만원씩 가계부채를 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집값이 내리면 가계부채 폭탄이 터진다. 대출 끼고 집을 산 사람들도 망하지만, 나 같은 세입자의 보증금도 날아간다. 나는 맥없이 정부, 건설자본, 자가 소유자들과 공동운명체가 되었다. 물론 위계로는 밑바닥이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비싼 수업료 물고 배웠지만, 그들조차 모르는 사실도 이참에 덤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 사는 곳보다 조금 더 변두리로 가니 낡은 연립주택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여태 버스 타고 숱하게 오가면서도 보지 못한 게 신기할 따름이다. 검색해보니 지금 가진 돈으로 전세를 구하고도 남는다. 내가 있는 곳이 바닥인 줄 알았는데, 바닥에 닿으려면 아직 멀었다. 이 사소한 깨달음은 다시금 시인 김수영의 성찰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었다.”(같은 시)


에어컨을 10년 가까이 켜지 않고 살고 있다. 전기세를 아끼려는 마음 반,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마음 반이었다. 그럼에도 여름은 해가 갈수록 더 뜨거워졌다. 나는 에어컨을 켜지 않았지만 훨씬 많은 사람들이 켠 결과일 것이다. 휴가 때 집 안에서 에어컨을 관상용으로 바라보는 고역을 치르다 깨달았다. 해마다 나는 여름의 절반 이상을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한여름을 온전히 에어컨 없이 버티는 수많은 이들을 못 보고, “조금쯤 옆에 서 있었다.”(같은 시)


마침내, 누구에게나,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조금은 덜 비켜서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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