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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01 어린 왕자가 될 뻔한 박래군

어린 왕자가 될 뻔한 박래군

발표글 2016.02.01 22:30 Posted by 지독한 정상

50대 중반인 박래군은 20대 때부터 자신의 삶을 인권운동에 바쳐온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짙은 구릿빛인데, 그 원인은 후천적인 데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리의 삶이 일상이다 보니, 얼굴 피부에 가해지는 일사량도 늘 차고 넘칠 터이다. 그가 거리에서 보낸 시간은 예외 없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의 시간은 가깝게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조금 멀게는 용산 참사 유가족들에게 온전히 바쳐졌다. 봉사로 치면 이만큼 헌신적인 봉사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얼마 전 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에 사회봉사명령 160시간을 선고받았다. 세월호 관련 미신고 집회·시위를 주도하고, 집회 도중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한 혐의에 대한 판결이었다. 이 나라 사법부가 이미 그의 인권운동에 몇 차례 실형을 선고한 전력이 있기에, 애초 그의 유·무죄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받은 형벌 유형(사회봉사명령)에 유독 눈길이 머물렀다.

당연하게도 이번 판결은 전적으로 법률에 의거하고 있다. 판사는 박래군이 집시법 위반 등의 동일전과가 있다며, 가중 처벌의 법리까지 짚었다. 반면, 그의 행동이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이었다며, 법적 정상 참작의 여지를 두기도 했다. 사건 기록과 법전을 꼼꼼히 뒤지고 범죄 동기까지 살피며 심사숙고를 거듭했을 창백한 낯빛의 판사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듯 어처구니없다. 봉사한 죄를 물어 봉사의 벌을 내린 셈이 되고 말았으니까.


이 우화적인 상황은 <어린 왕자> 속의 어느 장면을 연상시킨다. 어린 왕자가 처음 방문한 혹성의 왕은 더없이 지엄하면서도 인자하다. 어린 왕자가 하품을 하자 곧장 하품 금지 명령을 내리지만, 피로를 호소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하품 명령을 내린다. 어린 왕자가 대답한다. “하품 명령을 하시니 하품이 쏙 들어갔어요.” 왕권의 통치술로서 상대의 모든 행위에 명령을 내려야 했던 이 선량한 군주는 그만 분열 상태에 빠져 블라블라 외계어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번 사건의 성격은 판사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신실하면 신실할수록 안드로메다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한 헌신적인 봉사에서도 국가의 승인(합법)은 필수적이다. 나아가, 아무리 살리는 행위라 해도 통치(사회봉사명령)의 일환일 때라야 자격이 완성된다. ‘법률 기술자’인 판사가 보기에는 지당한 말씀일 수 있지만, <시적 정의>의 여성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보기에 이번 사건은 인류애적인 상상력을 한참이나 초과해버린 참사다.

박래군의 경우와 정확히 대칭되는 일화가 있다. 현 대통령의 대선 참모였던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대통령의 임명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밀린 5년치 적십자회비를 부랴부랴 일시불로 납부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인류애를 발휘해야 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자격이 있느냐는 잡음이 잠시 일었지만, 그가 총재가 되는 데는 아무런 법적 제약이 없었다. 불륜과 로맨스는 그렇게 갈린다. 총재는 취임 뒤부터 때만 되면 천연스레 적십자회비 고지서를 전 국민에게 발송한다. 안 내면 다시 신실하게 독촉장을 보낸다.

어쩌면 너무 한가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박래군과 그가 헌신해온 사람들이 처한 현실은 소설 속 어린 왕자의 현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하고 살벌하다. 박래군 사건의 판사가 제대로 한 일도 뜻하지 않게 그런 현실을 폭로한 것인지 모른다. 지난해 유럽으로 몰려든 난민들을 돕기 위해 생업까지 포기하고 구호활동을 펼친 그리스 섬 주민들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고 한다. 물론 남의 나라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 입국자들을 도우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이참에 법전이라도 뒤져봐야겠다. 박래군처럼 험한 꼴 당하지 않으려면.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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