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269)
세월호, 절대적 슬픔과 과학적 진실 눈송이는 굵고 다습해 보였다. 어느덧 서울 벚꽃도 얼추 졌는데, 불과 열흘 전 여론면엔 폭설 사진이 실렸다. 기상청도 놓친 ‘꽃샘 눈’ 풍경 사진인가 했더니, 청와대 분수대 앞 피케팅 사진이었다. 우산을 쓴 채 피켓에 쌓인 눈을 쓸어내는 이의 손 아래로 ‘세월호’ 세 글자가 또렷했고, 나머지 글귀는 눈에 덮여 희부옇다. “급선회 원인과 승객 구조 방기의 이유를 규명하라!” 급작스러운 강설에 방금 샀는지, 우산 끝엔 보증서 꼬리표가 매달려 있었다. 사진 제목은 ‘세월호 7주기에 부쳐’. 1월28일에 촬영했다는 설명이 붙었다. 더는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고 맞을 수 없게 된 4월의 문턱에서, 지난겨울 사진이 지면에 소환된 거였다. ‘철 지난’ 사진이긴 하지만, 세월호의 ‘오늘’을 포착한 이만한 시각적 메타포도..
기억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 ‘기억 앞에서의 겸손함’이 탁월한 문학적 수사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기억의 불확실성과 자의성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 없이 저런 표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 능력은 영리함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영리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뇌과학자들이 기억의 기제를 설명한 것들을 보더라도 저토록 사려 깊은 표현을 만날 수는 없다. 가령,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에릭 캔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기억은 그 핵심에서 보면 심장 박동과 다르지 않은 생물학적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더없이 명쾌하지만, 겸손이나 성찰 대신 상실감을 안긴다. 로맨틱한 기억도 쓰라린 기억도 저 설명 앞에서는 질적 차이를 상실한다. 그러나 오늘날 뇌과학자들의 이론을 참조하지 않고 기억의 원리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
‘꼬우면 이직하든가’의 공정성 나는 요즘 치밀하게 연출된 몰래카메라에, 그러니까 성착취 동영상이 아니라 30년 전 어름에 개그맨 이경규가 인기몰이했던 그 몰카에 혼자 속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든다. 한국토지주택공사(엘에이치) 내부자들의 땅 투기 의혹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단 분노와 관련돼 있다. 발본색원, 일벌백계, 투기수익 몰수, 물샐틈없는 방지 대책의 필요성에 이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러나 집단 분노의 수위나 밀도와는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혹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을까 부러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나를 향해 일제히 “속았지” 하며 박장대소할 것만 같다. 참여연대와 민변이 엘에이치 내부자 10여명의 광명·시흥 신도시 예정지 투기 정황을 처음 폭로했을 때, 한국 사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 경악했다. 육하원..
하청노동에 비친 후쿠시마 10년 2013년 도쿄에서 우편집배원으로 정년퇴직한 이케다 미노루는 이듬해 후쿠시마로 갔다. 그곳에서 1년 남짓 도쿄전력의 3차 하청노동자로 후쿠시마 원전 1호기와 주변 지역의 오염 제거 작업에 투입됐다. 43년 집배원 경험으로는 절대 알 수 없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후쿠시마를 떠날 때, 그는 1년 전의 그가 더는 아니었다. 이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라는 책으로 펴내고, 탈핵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후쿠시마로 떠나기 전 그의 머릿속은 원전 사고 복구에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과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반반이었다. 그 생각은 현지에서도 절반씩 실현됐다. 후쿠시마를 사람 살 수 있는 곳으로 되돌리는 데 필요하다는 작업을 하긴 했다. 파견회사도 그 일을 시급으로 쳐서 다달이 돈으로 주긴 줬다. 그러나 현장은 과학 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기’의 변주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경구는 쓰임새를 짚어볼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개의 비유가 걸린다. 그래도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낙후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경구가 만들어질 무렵에는 동물권은커녕 인권의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속담 속의 개는 ‘직업에 귀천 없다’는 평등주의와 한 자락 닿아 있다. 다만 평등은 버는 단계가 아니라 쓰는 단계에 달성된다. 프랑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교리와도 연결해 볼 만하다. 직업은 신에 의해 주어진 거여서, 그게 뭐든 죽어라 하고 돈을 버는 게 옳다. 그럼에도 쓰는 단계에서는 철저히 금욕적이어야 한다. 정승은 곧 금욕주의자여야 한다. 우리 속담과 견줄 만한 서구 규범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일 듯하다. ..
불가능을 요구하는 ‘휠체어 오큐파이’ 설 연휴의 여유를 누리려는 마음들이 부산해지기 시작하던 지난 10일 오후 3시 무렵, 서울 지하철 4호선에서 사달이 났다. 종점인 당고개역을 출발해 35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해야 할 열차의 운행 시간이 2시간30분으로 탄성 잃은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장애인권단체 활동가 100여명이 역마다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보행장애인이 다수였고, 휠체어가 장사진을 이뤘다. 지하철의 ‘정상’ 운행은 ‘불가능’했다. 주류 언론은 다들 무관심했다. 사람이 개를 무는 ‘비정상’보다 사소해 보여서였을 수 있다. 그러나 승객들 처지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고, 더러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귀성열차를 놓쳤을 터다. 솔직히 내가 그 처지였다면 휠체어 행렬 앞에서 장애 없는 두 다리를 동동거리며 장애인을 비하하는 육두문자를 속으로 삼..
그럴듯한 남성들의 처참한 실패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이 쓴 이 문장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밀도가 느껴진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또 수많은 피해자와 연대한 주체로서, 고통의 시간을 졸이고 졸여 응축한 질문이어서일 거라 겨우 짐작한다. 나아가, ‘그럴듯함’의 미망을 내려치는 저 망치 같은 질문을 받는 남성 처지에서는 자신 또한 ‘처참한 실패’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 의원이 말한 ‘그럴듯함’을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으로 고쳐 써본다. 미국에서 이 표현이 등장한 때는 18세기 말이지만, ‘차별 반대’의 뜻으로 쓴 건 197..
‘착함’만 남은 대통령 새해 기자회견 중계를 보고 나서 문재인 대통령한테 받은 인상은 ‘착함’이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지난 한 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갈등 사안들이 그의 반듯한 표현을 거쳐 지당한 것이 되는 걸 볼 때만 해도, 갈등을 회피하거나 관리하려 한다는 느낌 정도였다. 그럼 집권 5년차의 ‘무력감’ 혹은 ‘노회함’쯤으로 봐야 할 텐데, 표상과 실재가 그다지 밀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착함의 이미지는 문 대통령의 아동 학대 관련 발언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을 듣고 나서 한층 또렷해졌다. 그의 표현에 오해 소지가 있었던 건 맞다. 숲을 빼고 나무만 말한 게 컸다. 그러나 그걸 ‘인신매매’에 빗댄 비판은 과할뿐더러 논점에서도 이탈했다. 나는 문 대통령의 ‘말실수’가 피해 아동의 고통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