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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그럴듯한 남성들의 처참한 실패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이 쓴 이 문장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밀도가 느껴진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또 수많은 피해자와 연대한 주체로서, 고통의 시간을 졸이고 졸여 응축한 질문이어서일 거라 겨우 짐작한다. 나아가, ‘그럴듯함’의 미망을 내려치는 저 망치 같은 질문을 받는 남성 처지에서는 자신 또한 ‘처참한 실패’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 의원이 말한 ‘그럴듯함’을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으로 고쳐 써본다. 미국에서 이 표현이 등장한 때는 18세기 말이지만, ‘차별 반대’의 뜻으로 쓴 건 1970년 흑인 페미니스트 토니 케이드 밤바라가 최초라고 한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 대학가에서 ‘혐오발화 금지’가 제도화된 뒤 시나브로 ‘말조심’이라는 처세적 지침으로 변질됐다. 대학 당국은 이를 구성원 간의 갈등이 표출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장치로 사용했고, 학내 주류들은 소수자에 대한 교양인의 매너쯤으로 간주했다.

 

이렇듯 이 말(PC)의 쓰임이 탈정치화하는데도 외려 이에 대한 반동이 기승을 부렸다. 정치적 올바름을 ‘소수자의 압제’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써서 비난하는 <부자유스러운 교육>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91년 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피시가 자유로운 표현이나 행위에 대한 ‘억압’이라고 공공연히 외쳤다.(후지이 다케시, ‘정치적 올바름, 광장을 다스리다?’ 참조) 매너만 남은 피시와 피시에 대한 반동은 상호의존적이었던 셈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정치에 대한 백래시(반동·역습) 또한 그럴듯한 남성들의 매너가 부추기고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성정치는 과거 미국 대학가의 정치적 올바름 정도에 갇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처참한 실패의 사건이 번번이 일어나 내부의 그럴듯한 성평등의 민낯을 폭로하고, 안팎의 격렬한 백래시가 이를 거듭 폭로하는 패턴이 반복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이 질문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한다.”(장혜영, 앞의 글) 그 질문과 답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남성에게 있을 것이다.

※ <한겨레> ‘유레카’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1473.html

 

[유레카] 그럴듯한 남성들의 처참한 실패 / 안영춘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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