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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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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12%’의 눈에 비친 ‘대장동 사태’ 추석 연휴 때 일이다. 한달에 두어번 불가피한 용무에 쓰는 16년 된 소형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대기에 걸렸는데,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조수석 뒷바퀴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를 길가로 빼려고 사방을 둘러봤다. 검게 선팅된 독일산 고급차들이 에워싼 한가운데 우리 차가 투명한 탁상용 어항처럼 오도카니 놓여 있었다. 초보운전인 둘째 딸은 운전대 앞에서 놀란 금붕어마냥 얼어붙었다. 아비는 어떻게든 용기를 주고 싶었다. “쫄지 마! 우리 차는 상위 12%야!” 나는, 정확히 말해 ‘우리 가구’는 정부가 공인한 대한민국 상위 12%다. 25년 된 20평대 초반 아파트에 사는데, 윤희숙 전 의원과 다른 ‘순수 임차인’이다. 전세 대출금은 5년 만에 끝이 보인..
‘손발 노동’의 인간학 카를 마르크스가 인간을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존재’라고 한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수사만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공통점과 차이점), 인간과 인간(사회)의 관계 차원에서 숙고했고,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존재’라는 답을 내놓았다. 정치경제학이기 전에 인간학적 혹은 인류학적 탐구 결과라 할 수 있다.(죄르지 마르쿠스 지음, 정창조 옮김, 참조) 동물의 활동은 주어진 자연적 대상을 선천적인 욕구에 맞춰 점유하고 소비하는 데 국한된다. 물론 동물도 둥지 같은 것을 짓지만, 직접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소비한다. 이와 달리, 인간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 새롭게 능력을 발전시키고, 욕구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인간의 노..
탈진실 시대의 ‘무지’와 ‘무시’ ‘무지’와 ‘무시’는 획 하나만 다르지만, 뜻이 가깝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남’(타자)과 ‘님’의 관계처럼, 우연히 표기만 닮은 거라 여겨진다. 영어 ‘ignorance’(무지)와 ‘ignoring’(무시)을 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표기만 닮은 게 아니다. 동사 ‘ignore’는 ‘무지하다’와 ‘무시하다’의 뜻을 모두 갖고 있다. ‘모르는 것’과 ‘알은체하지 않는 것’은 뿌리가 닿아 있다는 듯.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모른다고 할 때, 그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철학자 낸시 튜어나는 무지를 4개 영역으로 나눴다. ①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②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③ (특권을 가진) 타인의 바람 때문에 모르는 것, ④ 의도적인 무지(레테나 샬레츨 지음,..
‘무릎 우산’ 사진이 말하지 않은 것들 ‘무릎 우산’ 사진의 첫인상은 아득할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앞에서 찍었다는 의 원본 사진에는 ‘꼭 이래야만 하는지…’라는 차분한 제목이 달렸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라는 듯이. 그러나 이미지의 의도는 빛의 속도로 초과 달성됐고, ‘황제 의전’이라는 작명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일부 언론은 ‘2021년, 이 정부가 인권을 말하는 순간’이라는 둥 문재인 정권으로 화살을 돌렸다.( 8월28일 1면 사진 제목) 이에 맞장구를 두드린 국민의힘 대선 후보들은 수행원한테서 황망히 우산을 받아 들거나 아예 비를 가리지 않는 연출로 정치적 반사이익을 꾀했다. 사진의 첫인상이 초현실적이었던 사정은 뒤늦게 감지됐다. 충북 지역의 한 언론이 사진 프레임 밖에서 벌어진 일들..
‘힙지로’의 카니발리즘 서울 중구 을지로 3·4가 일대는 요즘 ‘힙지로’라 불린다. 영어 ‘힙’(hip)과 ‘을지로’를 합친 표현이다. 국립국어원이 위키피디아처럼 운영하는 참여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을 보면, ‘힙하다’는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는 뜻이다. 고유함과 유행, 즉 신구 조화가 핵심이다. 이 뜻풀이에 힙지로만큼 잘 부합하는 곳도 드물다. 여느 ‘핫플레이스’와 달리 노포와 새 점포들이 잘 어우러져온 과정을 실증한 학술논문도 있다.(김은택 외, ‘인스타그램 위치정보 데이터를 이용한 을지로 3·4가 지역 활성화의 실증분석’, 20권 2호) 힙지로를 대표하는 곳으로 ‘노가리 골목’을 들 수 있다. 해가 지고 지하철 을지로3가역 4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별안간 들리는 야구장..
자유주의 독립신문의 그림자 은 우리 근대 신문의 효시이자 상징이다. 1957년 제정된 ‘신문의 날’은 창간일(1896년 4월7일)을 기리는 의미가 크다. 근대 신문에서 떠오르는 ‘자유’ ‘민주’ ‘인권’ 같은 신화적 이미지도 당연하다는 듯이 에 돌아간다. 그러나 이 신문의 실제 보도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에는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보도와 외세 의존적이면서 민중을 불신하는 보도가 모순적으로 공존했다. 가령 군주제 아래에서도 당당히 참정권을 주창했으나,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 백성은 민권이 무엇인지 모르니 함부로 그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오늘날 국회의원 격인 중추원 의관의 절반을 발행 주체인 독립협회가 뽑아야 한다(헌의 6조)며 왕권에 도전하면서도, 정작 백성의 저항..
‘시대적 특혜’라는 외설 김현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 후보자가 자기 소유 부동산 네 채를 두고 “시대적 특혜”라고 했다기에, 그와 나의 시간대가 얼마나 겹칠까 문득 궁금해졌다. 교집합이 꽤나 컸다. 공범 의식이 주입된 탓인지, 쑥덕공론 한번 못 해보고 그의 사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박은경 전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신파극 속 ‘행인 1’이었다면, 무려 시대를 호명한 김 후보자는 대하드라마의 히로인이었다. 비슷한 ‘시대적 특혜’를 누렸을 여권 정치인들을 비꼬았던 것이 ‘내로남불’의 덫에 걸려 드라마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시대를 볼모 삼은 그의 대사는 분명 잔망스러울 만치 영리했다. 김 후보자는 퇴장했으나, 그의 대사..
위험으로 평등해진 사회 ‘위험사회’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1944~2015)이 정립한 개념이다. 산업화를 거친 현대의 특징을 ‘위험’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인데, 작명이 썩 탁월해 보이지는 않는다. 현대가 위험사회면 현대 이전은 안전사회였나? 현대가 그 전 시대보다 확률이나 강도 면에서 더 위험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에 의해 위험해진 사회’ ‘전지구적으로 위험한 사회’ ‘빈부 가리지 않고 위험한 사회’ ‘위험을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회’로 변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은 작명도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 현대 사회의 위험의 형질이 어떻게 변했는지, 핵을 들어 짚어보자. 체르노빌 핵발전소 참사는 자연이 아닌 인간(의 과학기술)에 의해 일어났다. 발전소 인근인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넘어 모든 유럽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