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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시대적 특혜’라는 외설

김현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 후보자가 자기 소유 부동산 네 채를 두고 “시대적 특혜”라고 했다기에, 그와 나의 시간대가 얼마나 겹칠까 문득 궁금해졌다. 교집합이 꽤나 컸다. 공범 의식이 주입된 탓인지, 쑥덕공론 한번 못 해보고 그의 사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박은경 전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신파극 속 ‘행인 1’이었다면, 무려 시대를 호명한 김 후보자는 대하드라마의 히로인이었다. 비슷한 ‘시대적 특혜’를 누렸을 여권 정치인들을 비꼬았던 것이 ‘내로남불’의 덫에 걸려 드라마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시대를 볼모 삼은 그의 대사는 분명 잔망스러울 만치 영리했다.

 

김 후보자는 퇴장했으나, 그의 대사는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시대적 특혜’라는 단어 조합은 교묘하다. ‘우리 세대는 집을 마련하기가 지금 20~30대보다 수월했다’는 뜻으로 읽는다면 액면만 본 것이다. 서울과 부산에 산재한 그의 부동산이 실수요인지는 논쟁적일지 몰라도, 그만한 시대적 특혜가 같은 세대 대다수에게 고루 내려앉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김 후보자의 20~30대 이력에는 1980년대를 관통했던 시대적 아픔을 공유한 흔적도 눈에 띄지 않는다. ‘라떼 이즈 홀스’의 포즈를 취한 ‘시대적 특혜’는 자신이 20~30대에 무엇을 했는지 발설하는 법이 없다. 과거형 시제를 빙자한 현재형 시제를 통해 같은 나이대에 속하는 특권층에 시대적 아우라를 부여할 따름이다.

 

‘시대’는 그렇게 함부로 매명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뙤약볕 아래 소금이 오듯 진정성의 시간이 결정(結晶)으로 차곡차곡 쌓인 것이 시대다. 그럼에도 ‘시대적 특혜’라는 표현에는 얼마간 시대의 역설적 진실이 담겨 있다. 시대성이 짠맛을 잃고 시간이 모래처럼 흩어져버린 자리에서 시대의 매명은 발생한다. ‘시대적 특혜’는 지금 우리 사회에 공통의 가치 지향이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부재증명’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특권에 맞서는 대신 그 특권을 집단적으로 욕망하는 현실 앞에서 가치의 언어는 너무나 쉽게 교란되고, 약자의 언어마저 강자가 점령할 때 언어는 식민화된다. ‘시대적 특혜’는 그 작은 일례일 뿐, 특권을 신파조로 겨우 둘러대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저물었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 가운데 유난히 ‘말실수’가 잦은 이들이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발언 횟수에 견줘 밀리지 않는다. 그들의 말실수가 아직 ‘여의도 언어’에 익숙지 않아 벌어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진단은 제법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사정기관 최고 권력자 자리를 박차고 곧장 대선전에 뛰어든 대조군이 없기에 그 진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의 말실수에서는 잦은 빈도 못지않게 표현과 내용도 주목해야 한다. 말로는 약자를 위한다며 외려 가학성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행태는 훈련 부족 탓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 지독한 일관성은 언어가 식민화된 시대의 무람없는 외설이기도 하다.

 

식량 약자를 위해 부정식품을 허용해야 할뿐더러, 생필품인 집은 매점매석을 해도 세금을 매기지 말아야 하고, 건전한 교제와 세대 재생산을 위해 페미니즘이 건강해져야 하며, 저임금 노동을 강제하지 않는 건 청년 일자리에 대한 범죄행위라는 언설은 약자의 실존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특권층의 자기중심적이고 두려움 없는 ‘애민’의 언어학이다. 김현아 후보자가 ‘시대적 특혜’라는 표현으로 20~30대의 주거 빈곤을 어루만지듯 능멸한 것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윤 전 총장과 최 전 원장은 그런 점에서 샴쌍둥이다. 두 사람은 약자의 환심을 사려고 번지르르하게 빈말할 필요조차 사라질 만큼 언어의 식민화가 무르익은 시대를 대표하는 히어로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당 강령’은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다. 모순관계를 하나로 통합한다. 우리 사정기관 총수 출신 대선후보들의 어록과 동일한 구조다. 당이 편찬하는 ‘신어사전’은 대조관계의 두 단어, 가령 ‘덥다―춥다’를 ‘덥다―안 덥다’로 바꾸는 식으로 어휘 수를 줄이려 한다. 당 강령과 신어사전은 인민의 체제 순응을 위해 사고를 단순화시키려는 무서운 언어 기획이다. 잦은 말실수라고 예사로울까.

※ <한겨레> ‘유레카’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6610.html

 

[아침 햇발] ‘시대적 특혜’라는 외설 / 안영춘

안영춘 논설위원 김현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 후보자가 자기 소유 부동산 네 채를 두고 “시대적 특혜”라고 했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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