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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힙지로’의 카니발리즘

서울 중구 을지로 3·4가 일대는 요즘 ‘힙지로’라 불린다. 영어 ‘힙’(hip)과 ‘을지로’를 합친 표현이다. 국립국어원이 위키피디아처럼 운영하는 참여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을 보면, ‘힙하다’는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는 뜻이다. 고유함과 유행, 즉 신구 조화가 핵심이다. 이 뜻풀이에 힙지로만큼 잘 부합하는 곳도 드물다. 여느 ‘핫플레이스’와 달리 노포와 새 점포들이 잘 어우러져온 과정을 실증한 학술논문도 있다.(김은택 외, ‘인스타그램 위치정보 데이터를 이용한 을지로 3·4가 지역 활성화의 실증분석’, <서울도시연구> 20권 2호)

 

힙지로를 대표하는 곳으로 ‘노가리 골목’을 들 수 있다. 해가 지고 지하철 을지로3가역 4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별안간 들리는 야구장같이 왁자한 소리에 먼저 놀라게 된다. 생맥주에 노가리를 파는 술집 일색에 골목길까지 주객들로 넘쳐나는 풍경은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트로’(newtro)의 성지지만, 애초 단골은 인쇄소 같은 일대 영세업체 노동자들이었다. 인쇄소를 퇴사한 뒤 다른 지역에 같은 콘셉트로 술집을 차린 이들도 있다고 한다.

 

노가리 골목의 효시는 1980년에 문을 연 ‘을지오비베어’다. 그 뒤로 하나둘 노가리 전문 맥줏집들이 들어섰고, 그렇게 형성된 노가리 골목은 2015년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됐다. 2대째 부부가 운영하는 을지오비베어는 2018년 8월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노가리 골목이 소박한 노포들로만 구성된 건 아니다. 인스타그램 등에 가장 많이 소개되는 ‘만선호프’는 1983년에 문을 열었는데, 7년 전 주인이 바뀐 뒤로 기업형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메바처럼 점포를 8개로 늘려 골목 전체를 압도한다.

 

을지오비베어는 당장 폐업 위기에 몰려 있다. 2018년 건물주가 명도소송을 제기해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가게를 비우라는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지난 23일 5번째 강제집행이 시도됐지만,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를 비롯한 연대단체들이 저항해 다시 막아냈다. 가게가 비워지면 곧바로 만선호프 차지가 된다. 젠트리피케이션과 카니발리즘(동족끼리 잡아먹기)이 고약하게 착종한 모양새다.

 

※ <한겨레> ‘유레카’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9549.html

 

[유레카] ‘힙지로’의 카니발리즘 / 안영춘

서울 중구 을지로 3·4가 일대는 요즘 ‘힙지로’라 불린다. 영어 ‘힙’(hip)과 ‘을지로’를 합친 표현이다. 국립국어원이 위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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