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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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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상자 앞에 선 BTS 뮌헨 국제음악콩쿠르 바순 2위 수상자, 헬싱키 국제발레콩쿠르 2위 수상자, 서울 국제무용콩쿠르 현대무용 2위 수상자, 동아무용콩쿠르 한국무용 1위 수상자,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1위 수상자…. 이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장르의 유사성 같은 데서 단서를 찾다가는 끝내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예술 특기자 병역특례 대상이다. 국제대회는 2위까지, (국제대회가 없는 분야의) 국내대회는 1위에게만 자격이 주어진다. 삼엄한 징병제를 가뿐히 뛰어넘는 대회들이지만, 운영 주체가 국가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국내대회에서는 온나라 국악 경연대회만 국가(국립국악원)가 주최한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는 사단법인인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가, 동아무용콩쿠르는 언론사인 동아일보가 주최자다. 적용 대상 대회는 ..
꼼수 ‘드라이브스루’의 개천절 능멸 개천절은 애초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경축일이었다. 1909년 대종교를 연 나철 선생은 그해 음력 10월3일부터 해마다 개천절 행사를 거행했다. 이날은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이다. 개천절은 그 뒤 임시정부에 의해 국경일로 지정됐고, 광복 뒤에는 정식 국경일이 됐다.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양력 10월3일로 바뀌었다. 개천절은 3·1절, 광복절과 함께 3대 국경일이지만, 신도 수 4천명이 채 되지 않는 오늘날 대종교의 위상은 남루하다. 대종교의 ‘종’(倧)이 ‘신인’(神人·신이자 사람), 즉 단군을 뜻한다는 사실은커녕, 대종교가 어린이들도 다 아는 단군을 모시는 종교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은 듯하다. 대종교의 교세가 이토록 쇠한 데에는 외부요인이 결정적..
신전 위의 의사들 ‘당신과 당신 가족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해주겠다.’ 전자우편은 이렇게 시작했고, 이 한 문장으로 끝났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쏟아져 들어온 성난 전자우편 수백통의 발신인들과 같은 부류인 것만큼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날치 신문에 의약분업에 반발해 집단휴진 중인 의사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난 뒤였다. 한동안 잊을 수 없었던 그날의 기억이, 꼬박 20년이 지난 요즘 어제 일처럼 생생한 떨림으로 다시 떠오른다. 그사이 한국 사회는 부침을 겪고 더러 뒷걸음질 치기도 했지만, 외신도 ‘촛불혁명’이라고 상찬한 대통령 탄핵까지 일궈낼 정도였던 그 시간을 진보라 부르지 못할 바는 없다고 본다. 의사들의 시간만큼은 예외다. 사람을 살리는 역능이 사람을 죽음 앞에서 방치하는 역능으로 뒤집히는..
코로나 시대의 불로소득 코로나19의 2차 대유행을 막기 위한 초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방역’과 ‘약자의 생존권’을 맞교환하며 굴러가고 있다. 그러나 전쟁통에도 떼돈 버는 이가 있듯이, ‘비대면 업종’은 초호황을 누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 인터넷 쇼핑 같은 무점포소매 매출이 역대 최대인 46조2108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4% 증가한 것이다. 하반기에는 이조차 소박한 수치가 될 공산이 크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의 자산은 2020억달러(약 240조원)를 돌파했다.(미국 ‘정책연구소’(IPS)) 뉴질랜드의 연간 국내총생산(2069억달러)과 맞먹는다. 아마존 주가는 올해 86%나 뛰었다. 베이조스나 국내 전자상거래 1위 업체 쿠팡의 김범석 대표라고 해서 바이러스 창궐을 반겼을 리 없다. 그럼에도 ..
비판이 피해자를 만났을 때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오른쪽 둘째)가 지난 6월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치밀하기 이를 데 없는 ‘비판 시리즈’( )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첫번째 문턱은 책 제목이 아닌가 싶다. 오래전 선생도 멘토도 없이 홀로 머리 싸매고 책장을 넘기다 도돌이표처럼 이런 의문과 마주치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성을 공격하는 내용도 아닌데, 왜 ‘비판’이란 제목이 붙었을까? ’독일어 ‘Kritik’(크리티크)를 번역하면 ‘비판’이 맞다. 은 ‘비판’을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
‘내 집’인가 ‘내집’인가 ‘즐거운 나의 집’과 달리 ‘내 집 마련’이라고 할 때는 ‘내’와 ‘집’을 붙여 쓰는 관행이 있다. 심지어 ‘내집마련’으로 복합명사처럼 쓰기도 한다. 집에 대한 집단적인 소유 욕망이 띄어쓰기 맞춤법을 넘어선 결과일 것이다. ‘빈 집’ 대신 ‘빈집’이 처음부터 맞춤법은 아니었을 테고, ‘짜장면’이 어느 날 ‘자장면’과 동렬에 올랐듯이, ‘내집’도 머잖아 표준어로 등재되지 않을까. ‘내 집’은 사용 개념이고, ‘내집’은 소유 개념이라는 국립국어원의 뜻풀이와 함께. 그러나 사용 개념으로서의 집이 어느덧 사멸하고 나면, ‘내 집’도 결국 사어가 될 것이다. 조삼모사의 정부 주택 정책을 겨냥한 최신 버전의 구호는 “실수요자 외면 말라!”다. 여기서 ‘실수요’가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과 ‘마용성’ 등에 집중된다는 ..
애도는 무엇으로 애도인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의 대응을 묻는 기자에게 “××자식”이라고 한 것은 그저 욕설로만 들리지 않는다. 문제의 표현은 특정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이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표지를 붙인 데 연원을 두고 있다. 이 대표는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질문자의 자격을 따졌고, 그 자리가 박 시장의 빈소였던 맥락까지 고려하면 ‘애도자로서의 자격’을 따졌던 셈이다. 그의 욕설을 순화해 재구성하면 “당신은 애도자로서 자격 미달입니다”쯤 되지 않을까. 빈소에서 기자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논쟁적일 수 있다. ‘굳이 그 자리여야 했을까’라고 물으면 여러 논거로 찬반이 갈릴 것이다. 한국기자협회가 이 대표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을 낸 것은 ..
청와대 안의 트럼프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민주’와 ‘공화’는 하나의 명사로 묶여 있지만, 가치체계는 사뭇 다르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 때 시민들이 광장에서 외친 “국민의 명령이다”가 민주주의의 가치에 기초했다면, “이게 나라냐”는 공화주의에 기초했다. 대통령 비선 실세가 사사로이 공적 영역을 전유한 데 대한 탄식이 “이게 나라냐”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의 원리이고, 공화주의는 공공성의 원리다. 전자는 개별 국민의 권리 신장을, 후자는 공동선과 조화, 평등을 지향한다. 둘이 균형을 이루며 서로 보완하도록 설계된 게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실현은 쉽지 않다. 더구나 공화주의는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익숙지 않고, 개념적으로도 꽤나 복잡하다. 프랑스의 ‘부르키니’(무슬림 여성 전용 전신 수영복) 착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