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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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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한종선이 말했다. “나는 부랑자가 아니었습니다.” 술병이 비워지는 동안에도 몇번이고 되풀이했다. 얼마 뒤 토론회에 참석해서도 종선의 동료들한테서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납치, 감금, 폭행, 강제노동, 타살의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 말로 증언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한번은 경유했으며, 더러는 끝을 맺었다. 그들은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다.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에 걸쳐 운영된 사상 최악의 집단 강제 수용시설이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부랑자냐 아니냐’ 하는 이분법은 스스로 피해자 내부를 차별하고 위계화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러고도 나는 종선의 증언이 실린 라는 책에 서문을 썼다. 탈고한 뒤에도 도무지 개운치가 않았다. 책이..
이재용과 양창수, ‘또 하나의 가족’ ‘상피’(相避)는 친인척 사이의 비리와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운영됐던 유서 깊은 제도다. 기원은 부모와 자식이 재상급 관직에 동시에 오를 수 없도록 한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일종의 관습법이었다. 성문화는 고려 시대에 이뤄졌다.( ‘형법지’) 조선 시대 들어서는 적용 대상도 크게 확대됐다.() 일정한 촌수 안에 드는 친인척끼리는 같은 관아에서 관직을 맡지 못하게 했고, 과거 시험에서 감독관과 응시생의 관계로 마주치지 못하게 했다. 친인척이 당사자인 송사의 재판관도 맡을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지방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는 그 지방에 파견하지 못하게 했다. 뜻은 좋으나, 연좌제 성격이 없지 않다. 오늘날은 혈연을 이유로 공직의 진출, 승진, 보직을 사전에 제한하는 제도는 없다. 가령, 201..
5월 걸상 “걸터앉는 기구. 가로로 길게 생겨서 여러 사람이 늘어앉을 수 있는 거상(踞床)과 한 사람이 앉는 의자로 크게 나뉜다.” 에 나오는 ‘걸상’의 뜻풀이다. 언중은 흔히 걸상과 ‘의자’를 섞어서 쓰지만, 국립국어원은 걸상의 범주가 의자의 범주를 안으로 품는다고 정의한다. 와 는 빈센트 반 고흐가 프랑스 아를에 살 때 그린 작품이다. 평자들은 두 그림 모두 의자 주인의 인격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말한다. 반 고흐가 자신의 방을 그린 에도 의자 두개가 나오는데, 와 모양에 느낌마저 똑같다. 걸상은 본디 주인의 정령을 품는다는 듯이.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
반 고흐를 위한 ‘포스트 코로나’ 한달 남짓 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한 점이 도난당했다. 코로나19 사태로 휴관 중인 네덜란드의 한 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바이러스 창궐에 따른 찰나 같은 보안의 빈틈을 도둑은 대범하게 파고들었다. 훔칠 배짱도 능력도 없고, 작품값에서 초현실감밖에 느끼지 못하는 나는, 죽기 전 저명 화가의 작품 한 점 소장할 기회가 오면 무조건 반 고흐 작품을 고를 거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내 주머니 사정이 대수인가. 천문학적인 작품값은 어차피 화가 자신에게도 한푼 귀속되지 않은 것을. (어빙 스톤 지음, 최승자 옮김) 같은 전기나 (신성림 옮김) 같은 편지글을 읽다 보면, 그림을 향한 그의 불타는 열정만 와닿는 게 아니다. 살아서 작품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할 만큼 싸늘했던 미술계의 외면과 처절했던 가난, 또 굶..
‘99’의 쓸모와 쓰임새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토머스 에디슨의 말은 숫자 ‘99’에 관한 가장 유명한 어록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꽤나 자기도취적인 말이기도 하다. 저 명제는 천재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입증이 불가능하다. 에디슨은 한껏 겸양까지 드러내며 자신을 천재로 내세운 셈이 된다. 에디슨의 명제와 숫자 구성이 똑같기로는 ‘1 대 99 사회’를 들 수 있다. 경제 양극화로 소수 1%가 부를 독점하고 나머지 99%는 소외됐다는 구조 인식 프레임이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등이 대표적인 주창자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보 진영에서 대체로 고른 지지를 받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새해 기자회견에서 1 대 99 사회를 “전세계가 직면한 공통 과제..
전향 엘리트들의 강박적 망언 ‘전향’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 기원은 1922년 일본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던 야마카와 히토시가 그해 잡지 에 발표한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이라는 논문이다. 이후 ‘방향전환’은 ‘전향’이라는 축약어로 널리 쓰였다. ‘변절’의 뉘앙스는 없었다. 오히려 운동의 ‘참된 방향전환’이라는 맥락에서, 능동적 주체가 변증법적 전화 원리에 적극적으로 적응해가는 ‘자기 지양’의 의미가 강했다. 전향이 부정적 의미를 띠기 시작한 건 1930년대 들어서다. 사상경찰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개념을 급진파 학생들의 생각을 순치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관련 기술을 고안해 책자를 발행하고, 체포·구금된 학생들에게 써먹었다. 전향은 ‘자기 지양’에서 ‘투항’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살이..
미세먼지와 바이러스 안경은 마스크 위쪽 틈새로 빠져나온 후텁지근한 입김을 뽀얗게 뒤집어썼으나, 그 너머로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올려다보인다. 1년 전 이맘때 ‘시계 제로’의 어둡고 탑탑했던 하늘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지난해 초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온갖 대책이 쏟아졌지만, 대책 목록 가운데 ‘바이러스’는 들어 있지 않았다. 어느 전문가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코로나19가 해낸 것인가. 그러나 지난해에도, 또 올해도 우리는 마스크를 얼굴 높이 올려 쓰고 있다. 올봄 저 파란 하늘이 일러주는 가장 명징한 메시지는 초미세먼지 사태가 ‘사람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일상과 사람 집단의 산업 활동이 달라지자 공기도 달라졌다. 중국으로부터의 영향 감소도 그곳 사람들의 일상과 산업 활동이 달라진 데에 깊이 닿아 있을 터이다. 코..
표창장이 필요한 사람들 ‘조국 정국’을 대분류하면 절반은 ‘표창장 정국’이다. 논문 교신저자나 연구소 인턴 문제는 그 하위범주로 분류하면 된다. 핵심은 ‘조작’ 여부다. 대한민국 정치권과 검찰, 언론은 물론 온 국민까지 사생결단으로 이 문제에 매달려왔지만, 그 와중에 난 한갓지게 ‘표창장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고맙게도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조국 장관 낙마 표창장’으로 고민을 덜어줬다. 표창장이란 본디 부조리거나, 역설이거나, 한바탕 소극이었다. 표창장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때가 더러 있다. 4대강 사업 유공자로 표창장을 받은 이는 1152명이다. 수자원공사, 국토부, 환경부, 국방부 등에서 녹봉을 먹는 이가 가장 많다. 강을 파헤치고 막으면 물이 맑아진다고 했던 학자들이 뒤를 잇는다. 영주댐 사업을 담합해 처벌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