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기자 양반, 인생 왜 그렇게 살았소

어느 아랫녘 말씨에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탁성이 내려앉은 남성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성을 냈다. 다주택자 중과세를 주장한 그날 사설을 따지는 거였다. “서울 사는 자식들 주려고 강남 아파트 두 채 산 게 죄냐. 나 같은 서민이 세금 낼 돈이 어딨냐”고 했다. 세금은 벌금이 아니다, 실거주자인 자식들더러 내게 하시라 했더니 “자식들도 변변한 직업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속을 왜 몰라주느냐는 듯 대뜸 물었다. “기자 양반도 세금 낼 거 아니오?” 전셋집에만 살아 재산세 낸 적이 없다 하니, 이번엔 “청약에서 계속 떨어진 거냐”고 물었다.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짜 대답했다. 청약저축에 가입해본 적이 없노라고.

 

“아니,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았소?”

 

이 질문은 2020년이 저물 때 ‘내가 들은 올해의 어록’으로 등극할 게 확실하다. 처음엔 청약저축이 한 생애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그런데 몇달째 집 문제를 싸고 절대 통약할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갈래 아우성을 듣다 보니 그의 무례한 언사가 대단한 통찰로 다가왔다. 청약저축도 들지 않은 자는 시민권을 부여하기에 너무 태만한 존재라는 그의 인식에는 시대정신이 투영돼 있었다. ‘시대정신’이 과하다면 ‘공통감각’(common sense), 즉 ‘상식’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 부디 ‘욕망’이라 부르진 말자. ‘탐욕’의 뉘앙스가 들러붙는 걸 경계하기 위함이다. 이 생지옥을 탐욕 탓으로 돌리는 건 천국의 문을 거저 열려는 거와 같다.

 

유난히 집을 탐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최근엔 박덕흠 의원이 있었다. 그런 박 의원마저 ‘집값 폭등의 피해자’를 자처하며, 세금 많이 내게 된 억울함을 앞의 무명씨와 공유한다. 박 의원이 유독 손가락질을 받는 건 그의 권력과 권력질 탓이 크다. 우리 무명씨는 애초 권력과 무관한데다, 살뜰히 청약저축 부어 ‘청약 로또’에 당첨됐는지도 모른다. 4년 전 내가 살던 지역에 갭투기 바람이 불어 살던 집에서 내쫓긴 적이 있다. 그 방면 명망가를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죽어라 전국을 돌며 발품을 팔지요. 발품 파는 만큼 뽑아 먹을 게 나온다, 그게 진리예요.” 공통감각, 상식과 동떨어진 답은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월11일 오전 경기 화성시 LH 임대주택 100만호 기념단지인 동탄 공공임대주택에서 복층 임대주택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집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 격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 에피소드와 동일한 의식 지평 위에서 펼쳐진다. 붉은 여왕의 손아귀에 잡혀 뛰던 앨리스는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러 자신이 출발점에 되돌아와 있음을 알아챈다. 붉은 여왕이 말한다. “제자리에 있으려면 끊임없이 뛰어야 한다.” 붉은 나라에서는 그것이 공통감각이고 상식이다. 다만 달리기 실력은 천부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각양각색에 천양지차고, 실력 차에 비해 앞뒤 간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진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이면 제자리에 머물 수조차 없다. 행여 멈추기라도 하면 낙오와 동시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왜 인생을 그따위로 살아?”

 

진영 간의 담론 투쟁도 실상 속도에 관한 차이일 뿐, 뛰는 방향은 같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속도는 소수의 탐욕보다 기존의 위계를 유지하려는 압도적 다수가 가속페달을 밟은 탓이 더 크다. 정책을 스무번 넘게 내놔도 “나 잡아봐라”와 “거봐라”만 반복하는 토건 마피아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저들은 정책 따위 보지 않는다. 사람 마음, 시대적 정동만 본다. 중산층의 기대를 충족하는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이 나와야 한다는 언설도 탈지옥과는 무관한 주문이다. 전용면적 13평(공급면적 21평) 논란에서 개중 이성적인 보도조차 지금 면적 기준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키우고 늘리는 게 시대정신임을 새삼 증명하듯.

 

‘생태주의적 면적’을 떠올려본다. 주택 공급도 결국 토지라는 한계 자원과 만나게 돼 있다. 무한할 것 같던 대기와 해양도 지금 깊이 신음하고 있다. 집이 공공의 가치재가 되기 위해 더 넓은 평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자동차가 탄소중립으로 가기 위해 더 큰 배기량이 필요하다는 주장만큼이나 모순 아닌가. 뛰지 않는 자에게 제한속도를 맞추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속도는 줄지 않는다. 하물며 천국의 문이 열릴까. 지금은 뛰지 않을 자유를 넘어, 뛰지 말아야 할 책임까지 상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인생 잘 사셨소!’라고 서로 격려하면서.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4743.html

 

[아침 햇발] 기자 양반, 인생 왜 그렇게 살았소 / 안영춘

안영춘 Ι 논설위원 어느 아랫녘 말씨에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탁성이 내려앉은 남성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성을 ...

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