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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 민주주의’의 경고 네거리를 붕대처럼 휘감은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펼침막을 바라보며, 1번과 2번 기호만 가리는 상상을 해봤다. 두 거대 정당 후보들의 소속을 전혀 분별할 수 없었다. 원칙대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면접관이 면접자의 학벌 따위 배경 자원을 알아챌 수 없듯이. 10음절 안팎에서 끝나는 구호들은 개발 지상주의의 정수라 할 만했고, 1번과 2번이 그걸 두고 일합을 겨루는 형세였다. 그러나 두 정당이 때 되면 ‘현명하다’고 칭송하는 유권자들은 잘 안다. 어느 쪽이 개발에 더 유능한지. 그날은 집주인이 별안간 직접 들어와 살겠다 해서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는 길이었다. 1기 새도시 중에 가장 싼 동네라는데도, 1년 반 만에 전셋값이 다락같이 올라 있었다. 그동안 급여 한푼 안 쓰고 모았어도 턱없이 모자랄 판이었다. ..
세상 밖으로 나온 일기들 일기는 극히 사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더러 세상 밖으로 나와 명성을 얻고, 고전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생생한 사실과 깊은 내면이 동시에 담겨서일 터이다. 국내외를 아울러 세권을 꼽는다면, (시대순)가 어떨까. 이순신 장군의 는 대한민국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하다. 음력 1592년 정월 초하루부터 1598년 11월17일까지의 기록으로, 마지막 일기는 장군이 전사하기 이틀 전에 쓰였다. 그날그날 전황 같은 건조한 사실만 기록돼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의 건강 상태,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사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영역본 제목은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이다. 는 독일 출신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1942년 6월12일~1944년 8월1일 나치의 감시를 피해..
그래서 누구의 ‘자유’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폭포 세례와도 같았다. 양과 질 모두 그랬다. 16분 남짓 동안 35번 입에 올렸고, 대한민국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할 독보적 가치로 추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취임사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인 ‘하이쿠’처럼 언어 밖으로 탈주하려는 텅 빈 기표 같기도 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과 ‘세계 시민 여러분’에게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해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문할 뿐, 왜 자유가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도약과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혁신과 필연적 관계인지 따위에는 지극히 말을 삼갔다. 친절한 설명이 있어도 채워 넣기 어려운 그 광막한 행간은 결국 그가 5번 호명한 ‘여러분’ 몫으로 할당됐다. 하지만 각자 흩어져 따로 노는 저 파편적 개념들 ..
왜 마스크를 벗지 못할까 지난 2일부터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됐지만, 막상 거리에서 마스크 벗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해제 시기를 두고 ‘신-구 권력 갈등’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걸 생각하면 머쓱할 지경이다. 아직 초기여서일 수도 있겠으나, 사람들이 제야의 종 카운트다운하듯 마스크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할 거라는 합리적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속옷 벗는 것 같아서’ 유의 말을 흔히 하는 걸 보면, 개인방역 차원의 신중함 때문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마기꾼’(마스크+사기꾼)이라는 신조어는 마스크의 미학적 쓸모를 시사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지난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템플대 연구팀은 얼굴 사진 30개에 마스크를 씌우지 않은 때와 씌운 때 사람들의 반응을 비교했다. 남녀 사진 모두 마..
‘비문명’의 역습이 시작됐다 “이 싸움은 어떻게 끝날까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 박경석의 휠체어를 미는 활동지원사이자 전장연 활동가인 그가 팔을 뻗어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답하는 순간, 내 잔이 흘러넘쳤다. 30대 중반 한창나이인 그의 눈 밑으로는 다크서클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끝날까’는 ‘언제 끝날까’이기도 한 눈치였다. 활동가들은 초인적인 의지로 넉달째 과로를 버티고 있다고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어록에서 한 문장을 빌려 와 격려를 대신한다. “내 지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내 의지는 낙관주의적이다.” 각주를 달면 이렇다. ‘이 싸움’을 뭐로 보느냐에 따라 답도 완전히 달라진다. ‘장애인 권리예산’에 대한 대통령 당선자 쪽의 약속을 받아내는 싸움이라면, 지금의 과로에 쉼..
원희룡의 제주판 론스타 사건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와 추경호 경제부총리 후보자 지명으로 ‘론스타 사건’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두 후보자의 연루 여부 때문이다. 이 사건은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사들인 뒤 하나은행에 되팔아 4조6천억원의 차액을 챙긴 데 이어, 우리 정부에 5조6천억원 규모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S)을 건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잘못하면 국민 1인당 최대 10만원에 이르는 세금이 투기자본에 넘어갈 수 있다. ‘녹지병원 사건’은 론스타 사건의 지방정부 판본이라 할 만하다. 2018년 12월 원희룡 당시 제주도지사는 중국 부동산 개발 자본인 녹지그룹에 국내 최초로 영리병원 허가를 내줬다. 그런데 녹지가 진료 대상을 외국인으로 제한한 것을 문제 삼아 문을 열지 않자, 제..
2022년, 몽진과 파천 같은 뜻을 지닌 몽진(蒙塵)과 파천(播遷)은 고귀하면서도 누추한 표현이다. 오직 임금에게만 쓸 수 있지만, 궁을 버리고 몸을 피할 수밖에 없는 딱한 행위를 이른다. 몽진은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성 두보의 ‘춘망’(春望)에 나온다. 제아무리 임금이라도 피난길에는 먼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몽진에는 시적 파토스가 서려 있다. ‘임금이 자리를 옮긴다’는 뜻의 파천은 상대적으로 덤덤하다. 하지만 실상은 한층 누추하다. 1896년 2월11일 이른 아침 , 궁녀 교자(가마) 두대가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갔다. 한대에 둘씩 ‘합승’하고 있었다. 교자는 1㎞ 남짓 떨어진 러시아공사관 앞에 멈춰섰다. 상궁 옷차림의 네 사람이 내렸다. 하지만 그중 둘은 여장 남자. 고종과 세자였다. 한해 전..
쓸모 있는 어느 대선 이야기 20대 대선 결과가 나온 지도 2주가 지났다. 여느 때처럼 승패의 결과를 토대로 과정을 복기하는 백가쟁명이 만개했다. 세대와 젠더는 누구나 언급한다. 진영과 이념도 못지않다. 거대 양당의 패권주의와 이를 재생산하는 87년 체제는 진보 논객이면 빠뜨리는 법이 없다. 미-중 갈등이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국제 정세의 영향이 언급되는가 하면, ‘탈진실 시대’라는 글로벌한 현상이 후경에 배치되기도 한다. ‘거봐라’ 식의 사후예언적 냉소와 ‘민심은 천심’이라는 게으른 인식론, ‘졌지만 잘 싸웠다’는 정신승리법도 적지 않지만,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하는 탁월한 분석이 넘쳐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쓸모’는 별개의 문제다. 대통령실 이전을 둘러싼 사상 유례없는 ‘당선자 폭주’ 사태가 공론장을 블랙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