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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독립신문의 그림자 은 우리 근대 신문의 효시이자 상징이다. 1957년 제정된 ‘신문의 날’은 창간일(1896년 4월7일)을 기리는 의미가 크다. 근대 신문에서 떠오르는 ‘자유’ ‘민주’ ‘인권’ 같은 신화적 이미지도 당연하다는 듯이 에 돌아간다. 그러나 이 신문의 실제 보도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에는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보도와 외세 의존적이면서 민중을 불신하는 보도가 모순적으로 공존했다. 가령 군주제 아래에서도 당당히 참정권을 주창했으나,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 백성은 민권이 무엇인지 모르니 함부로 그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오늘날 국회의원 격인 중추원 의관의 절반을 발행 주체인 독립협회가 뽑아야 한다(헌의 6조)며 왕권에 도전하면서도, 정작 백성의 저항..
‘시대적 특혜’라는 외설 김현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 후보자가 자기 소유 부동산 네 채를 두고 “시대적 특혜”라고 했다기에, 그와 나의 시간대가 얼마나 겹칠까 문득 궁금해졌다. 교집합이 꽤나 컸다. 공범 의식이 주입된 탓인지, 쑥덕공론 한번 못 해보고 그의 사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박은경 전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신파극 속 ‘행인 1’이었다면, 무려 시대를 호명한 김 후보자는 대하드라마의 히로인이었다. 비슷한 ‘시대적 특혜’를 누렸을 여권 정치인들을 비꼬았던 것이 ‘내로남불’의 덫에 걸려 드라마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시대를 볼모 삼은 그의 대사는 분명 잔망스러울 만치 영리했다. 김 후보자는 퇴장했으나, 그의 대사..
위험으로 평등해진 사회 ‘위험사회’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1944~2015)이 정립한 개념이다. 산업화를 거친 현대의 특징을 ‘위험’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인데, 작명이 썩 탁월해 보이지는 않는다. 현대가 위험사회면 현대 이전은 안전사회였나? 현대가 그 전 시대보다 확률이나 강도 면에서 더 위험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에 의해 위험해진 사회’ ‘전지구적으로 위험한 사회’ ‘빈부 가리지 않고 위험한 사회’ ‘위험을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회’로 변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은 작명도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 현대 사회의 위험의 형질이 어떻게 변했는지, 핵을 들어 짚어보자. 체르노빌 핵발전소 참사는 자연이 아닌 인간(의 과학기술)에 의해 일어났다. 발전소 인근인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넘어 모든 유럽 국가..
오늘의 적, 내일의 적 대통령 선거 얘기를 하지 않는 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시절이 돌아왔다. 자신이 찍은 후보가 당선되는 걸 본 적이 없는 이라면 성가시거나 소외된 시간으로 들어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냉소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육박해오는 시간일 수 있다. 후보와 그 진영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선거에 졌다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후보는 여태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국민의 현명한 선택 앞에 고개 숙이고, 서둘러 앞날을 다짐했을 뿐이다. 2012년 12월19일, 대선 결과가 나오기 무섭게 노동자 세 명이 목숨을 끊었다. 모두 장기 투쟁 사업장 소속이었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게 아니라 천 길 벼랑 끝이 발밑에서 무너진 ‘추락사’였다. 애초 그들 앞에 놓인 ‘죽느냐 죽..
‘국민 약탈’과 ‘죽창가’ ‘약탈’(掠奪)의 ‘약’은 ‘노략질’을 뜻한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짓이다. ‘수탈’(收奪)은 어떻게 다를까. 강제성에서는 약탈과 다르지 않으나, 물리적 직접성에서 차이가 난다. 약탈은 완력이 가닿는 만큼만 빼앗을 수 있다. 수탈은 제도의 힘을 빌린 빼앗음이다. 도달 범위는 직접적 물리력이 아닌 제도 설계에 의해 결정되기에 약탈보다 광대하다. 약탈은 눈앞에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지만, 수탈은 직접 손에 피 묻힐 일이 없다. 왜구는 약탈했고, 일제는 수탈했다고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둘의 차이를 가려서 쓰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듯하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국민 약탈’이라는 생경한 표현을 썼다. 문재인 정부에 왜구 이미지를 덧씌우..
윤석열이 ‘우당 기념관’에 간 까닭은 이준익 감독의 근작 에서 정약전(설경구)은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라고 말한다. 실제 기록에 근거한 대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사회에서 유난히 이해도가 낮은 ‘아나키즘’의 핵심을 잘 짚고 있다. 아우 약용(류승룡)의 목민적 사유와 자연스럽게 대비한 연출은 아나키즘의 결까지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나키즘(anarchism)은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엉터리없는 번역은 아니지만, 납작하고 빈약한 번역이다. 아나키즘이 반대하는 대상은 정부에 국한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국제관계 등 모든 분야와 차원의 억압적 지배에 반대한다. 무엇보다 ‘무정부주의’는 미국 서부영화 속 같은 무법천지를 연상시키는 부정적 효과가 크다. 정약전이 ..
어느 리더의 죽음 ‘리더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장을 써놓고 보니, 패전한 사무라이 우두머리가 맞았을 법한 최후의 순간이 일본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연상된다. 그 정조는 단연 비장함이었을 것이다. ‘비장’이라는 낱말에서 비(悲)와 장(壯)은 대등하지만, 죽음마저 자신의 결단임을 내세우는 저 미학적 행위에서만큼은 장엄함이 슬픔을 압도한다. 얼마 전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던 한 젊은이가 세상을 등졌다. 그 또한 리더였다. 이 글 첫 문장을 그대로 옮겨도 사실관계에 어긋남은 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 어름엔 장엄함의 옅은 그림자 한 조각 어른거리지 않았다. ‘리더’는 네이버가 그에게 부여한 직책이었다. 한국 아이티(IT) 업계를 선도한다는 기업답게 직함 하나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에 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내..
마녀 감별법과 ‘집게손’의 착시 다음 중 중세부터 근세까지 사용된 유럽의 마녀 감별법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1)손발을 묶어 물에 던진다, (2)바늘로 온몸 구석구석을 찌른다, (3)불로 달군 쇠판 위를 걷게 한다, (4)성경을 소리 내 읽게 한다. 정답은 ‘없다’이다. 넷 다 마녀 감별사들이 ‘애용’한 방법이다. 왜 아니었겠나. 용의자로 지목만 하면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만능 덫이거늘. 마녀 용의자는 물에 가라앉으면 그대로 죽고, 혹 부력으로 떠오르면 마녀로 감별돼 처형됐다. 바늘에 찔리다 고통에 못 이겨 마녀라고 실토해도, 어쩌다 감각이 없는 곳을 찔려 가만있어도 또한 마녀이기에 죽음을 비켜 갈 수 없었다. 쇠판 위에서 죽지 않고 요행히 살아 내려오면 불에도 죽지 않는 마녀가 틀림없으므로 화형됐다. 불로 달군 쇠판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