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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요구하는 ‘휠체어 오큐파이’ 설 연휴의 여유를 누리려는 마음들이 부산해지기 시작하던 지난 10일 오후 3시 무렵, 서울 지하철 4호선에서 사달이 났다. 종점인 당고개역을 출발해 35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해야 할 열차의 운행 시간이 2시간30분으로 탄성 잃은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장애인권단체 활동가 100여명이 역마다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보행장애인이 다수였고, 휠체어가 장사진을 이뤘다. 지하철의 ‘정상’ 운행은 ‘불가능’했다. 주류 언론은 다들 무관심했다. 사람이 개를 무는 ‘비정상’보다 사소해 보여서였을 수 있다. 그러나 승객들 처지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고, 더러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귀성열차를 놓쳤을 터다. 솔직히 내가 그 처지였다면 휠체어 행렬 앞에서 장애 없는 두 다리를 동동거리며 장애인을 비하하는 육두문자를 속으로 삼..
그럴듯한 남성들의 처참한 실패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이 쓴 이 문장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밀도가 느껴진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또 수많은 피해자와 연대한 주체로서, 고통의 시간을 졸이고 졸여 응축한 질문이어서일 거라 겨우 짐작한다. 나아가, ‘그럴듯함’의 미망을 내려치는 저 망치 같은 질문을 받는 남성 처지에서는 자신 또한 ‘처참한 실패’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 의원이 말한 ‘그럴듯함’을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으로 고쳐 써본다. 미국에서 이 표현이 등장한 때는 18세기 말이지만, ‘차별 반대’의 뜻으로 쓴 건 197..
‘착함’만 남은 대통령 새해 기자회견 중계를 보고 나서 문재인 대통령한테 받은 인상은 ‘착함’이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지난 한 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갈등 사안들이 그의 반듯한 표현을 거쳐 지당한 것이 되는 걸 볼 때만 해도, 갈등을 회피하거나 관리하려 한다는 느낌 정도였다. 그럼 집권 5년차의 ‘무력감’ 혹은 ‘노회함’쯤으로 봐야 할 텐데, 표상과 실재가 그다지 밀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착함의 이미지는 문 대통령의 아동 학대 관련 발언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을 듣고 나서 한층 또렷해졌다. 그의 표현에 오해 소지가 있었던 건 맞다. 숲을 빼고 나무만 말한 게 컸다. 그러나 그걸 ‘인신매매’에 빗댄 비판은 과할뿐더러 논점에서도 이탈했다. 나는 문 대통령의 ‘말실수’가 피해 아동의 고통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한..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권력’ 미셸 푸코는 감옥, 군대, 병원, 학교를 근대의 상징 공간으로 봤다. 감옥은 이들 공간의 특징이 응축된 정점이다. 중세의 형벌이 주로 공개 처형 같은 신체형이었다면 근대의 형벌은 형기를 채우게 하는 구속형이다. ‘교도소’라는 이름에도 나타나듯, 구속형의 명분과 목적은 규율의 내면화에 있다. 감옥, 군대, 병원, 학교는 하나같이 규율을 가르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병원이 유독 튄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이라는 소년체전 구호를 보자. 개인의 건강한 신체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사회의 것이기도 하다. 근대 ‘규율권력’에 ‘신체건강’과 ‘품행방정’은 실과 바늘 같은 노동자 규범이며, 의료 행위는 그런 노동자를 공급하기 위한 조처의 일부다. 그럼에도 끝내 규범에..
기자 촌지 전봉민 국회의원(부산 수영구)과 전광수 이진종합건설 회장 부자에 관한 의혹은 부산 지역 건설업체 사주 일가가 1조원 가까운 분양 수익을 챙기는 과정에서 지역 정치권이나 관료 사회와 불법·탈법으로 어떻게 얽혔느냐가 핵심이다. 그러나 (MBC)의 보도(12월20일)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전 회장이 기자에게 3천만원의 ‘촌지’를 제안하는 대목이다. 당사자의 육성이 생생히 살아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기자 촌지에 관한 직접적인 보도가 그동안 워낙 희소했던 탓도 컸을 터이다. 기자 촌지는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언론에 그 실상이 ‘팩트’로 보도된 건 1991년 11월1일치 ‘보사부 기자단 거액 촌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처음이었다. 그해 추석을 전후해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기자단이 재벌 ..
기자 양반, 인생 왜 그렇게 살았소 어느 아랫녘 말씨에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탁성이 내려앉은 남성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성을 냈다. 다주택자 중과세를 주장한 그날 사설을 따지는 거였다. “서울 사는 자식들 주려고 강남 아파트 두 채 산 게 죄냐. 나 같은 서민이 세금 낼 돈이 어딨냐”고 했다. 세금은 벌금이 아니다, 실거주자인 자식들더러 내게 하시라 했더니 “자식들도 변변한 직업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속을 왜 몰라주느냐는 듯 대뜸 물었다. “기자 양반도 세금 낼 거 아니오?” 전셋집에만 살아 재산세 낸 적이 없다 하니, 이번엔 “청약에서 계속 떨어진 거냐”고 물었다.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짜 대답했다. 청약저축에 가입해본 적이 없노라고. “아니,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았소?” 이 질문은 2020년이 저물 때 ‘내가 들은 ..
시적 정의와 법치주의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은 전공이 철학과 문학인데, 1994년부터 이 대학 로스쿨에서 고전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강의를 했다. 그 강의에서 영감을 얻어 쓴 책이 (Poetic Justice)라는 명저다. 시카고대에서 미래 법률가들에게 문학 강의를 한 건 누스바움이 처음은 아니다. 1970년대 초부터였다고 하니 유서가 깊다면 깊은데, 우리에게는 몹시 낯설기만 하다. 법대나 로스쿨 강의실이라면 법리에 정통한 석학, 가령 70년대 미국 드라마 에서 입꼬리가 고집스럽게 처진 킹스 필드 교수가 학생들의 논리적 빈틈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풍경이 떠오른다.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 디킨스를 읽는 누스바움 강의의 풍경은 사뭇 대조적이다. 밤잠 내쫓으며 법전을 외워야 하는 미래 법률가들에겐 부질없는..
수어, 모두를 위한 손짓 코로나19가 ‘뉴노멀’(새로운 표준) 행세를 하는 탑탑한 현실 위로 또 하나의 청량한 뉴노멀 하나가 자리 잡았다. 수어 통역이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지난 2월4일 브리핑 때부터 수어 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19 정보에서 농인(청각장애인)이 소외와 차별을 받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뒤였다. 지금은 중앙정부는 물론, 광역과 기초 지자체의 어느 브리핑에서나 수어 통역을 볼 수 있다. 시각적으로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수어 통역자가 발표자 옆에 나란히 선다. 과거에는 무대 바깥에 멀찍이 떨어져 섰다. 통역자의 대등해진 위상은 상징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화면 속 통역자의 손짓이 예전보다 훨씬 크게 보이게 됐다. 수어는 시각 언어다. 크게 보일수록 소통에 유리하다. 화면 한 귀퉁이에 더부살이하듯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