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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를 설계하라 ‘설계’는 대장동 사태의 열쇳말이다. 검찰 수사의 길잡이별이 ‘설계’임은 물론이다. 누가, 왜 수익 배분을 그렇게 설계했는지 사법적으로 특정하는 것이 검찰이 가려는 최종 목적지일 것이다. 인물로 치환하면 화천대유 3인방을 비롯한 토건-법조 카르텔을 경유한 뒤에야 나올 ‘윗선’일 것이다.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단을 가진 수사라고 단정하면 그 또한 섣부른 예단이다. 수사의 범주를 제한하다간 외려 성역 논란을 부를 수도 있다. 예단을 가진 수사와 성역 없는 수사는 기실 한끗 차이다. 문제는 의도성을 가진 수사인지 여부다. 그러할지 우려하는 시선과 그러하길 기대하는 시선 모두 탄탄한 경험칙에 근거하고 있다. 검찰은 그 우려와 기대 사이의 협곡을 통과해야 한다. 스스로 지은 업보..
‘종내 차별주의자’인 어느 반려인 ‘쾌고감수능력’(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동물권 운동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영어로는 ‘sentience’인데, 일반적으로 감각성이나 지각력을 가리키는 이 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가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다. 싱어는 (1975)에서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동물종에는 공리주의의 원리인 ‘이익평등고려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리주의에서 고통은 그 자체로 이익에 반하는 것이므로, 인간과 동물 할 것 없이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근대 휴머니즘이 정작 비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종 차별주의’나 다름없음을 일깨운다. 인간의 동물 단백질에 대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공장식 축산이 만연하고, 지적 호기심이나 질병..
이재용의 ‘판도라 상자’ ‘파나마’ ‘파라다이스’ ‘판도라’…. 로마자 머리글자가 ‘피’(P)인 것 말고 공통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셋 사이를 별자리마냥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했다. 국제탐사언론인협회(ICIJ)는 100여개국 기자 수백명이 협업해 탐사 취재와 보도를 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다. 우리나라에서는 가 참여하고 있다. 2013년부터 전세계 유명짜한 정치 지도자, 억만장자, 스타 등이 조세회피처에 자산을 빼돌리는 실태를 파헤쳐 보도하는 데 주력해왔다. 파나마 페이퍼스(2016년) 때부터 주요 탐사 프로젝트에 ‘페이퍼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파라다이스 페이퍼스(2017년)와 판도라 페이퍼스(2021년)가 뒤를 이었다. ‘페이퍼스’는 미국 국방부의 베트남전 비밀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스’를 가 폭로한 것에 ..
‘상위 12%’의 눈에 비친 ‘대장동 사태’ 추석 연휴 때 일이다. 한달에 두어번 불가피한 용무에 쓰는 16년 된 소형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대기에 걸렸는데,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조수석 뒷바퀴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를 길가로 빼려고 사방을 둘러봤다. 검게 선팅된 독일산 고급차들이 에워싼 한가운데 우리 차가 투명한 탁상용 어항처럼 오도카니 놓여 있었다. 초보운전인 둘째 딸은 운전대 앞에서 놀란 금붕어마냥 얼어붙었다. 아비는 어떻게든 용기를 주고 싶었다. “쫄지 마! 우리 차는 상위 12%야!” 나는, 정확히 말해 ‘우리 가구’는 정부가 공인한 대한민국 상위 12%다. 25년 된 20평대 초반 아파트에 사는데, 윤희숙 전 의원과 다른 ‘순수 임차인’이다. 전세 대출금은 5년 만에 끝이 보인..
‘손발 노동’의 인간학 카를 마르크스가 인간을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존재’라고 한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수사만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공통점과 차이점), 인간과 인간(사회)의 관계 차원에서 숙고했고,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존재’라는 답을 내놓았다. 정치경제학이기 전에 인간학적 혹은 인류학적 탐구 결과라 할 수 있다.(죄르지 마르쿠스 지음, 정창조 옮김, 참조) 동물의 활동은 주어진 자연적 대상을 선천적인 욕구에 맞춰 점유하고 소비하는 데 국한된다. 물론 동물도 둥지 같은 것을 짓지만, 직접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소비한다. 이와 달리, 인간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 새롭게 능력을 발전시키고, 욕구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인간의 노..
탈진실 시대의 ‘무지’와 ‘무시’ ‘무지’와 ‘무시’는 획 하나만 다르지만, 뜻이 가깝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남’(타자)과 ‘님’의 관계처럼, 우연히 표기만 닮은 거라 여겨진다. 영어 ‘ignorance’(무지)와 ‘ignoring’(무시)을 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표기만 닮은 게 아니다. 동사 ‘ignore’는 ‘무지하다’와 ‘무시하다’의 뜻을 모두 갖고 있다. ‘모르는 것’과 ‘알은체하지 않는 것’은 뿌리가 닿아 있다는 듯.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모른다고 할 때, 그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철학자 낸시 튜어나는 무지를 4개 영역으로 나눴다. ①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②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③ (특권을 가진) 타인의 바람 때문에 모르는 것, ④ 의도적인 무지(레테나 샬레츨 지음,..
‘무릎 우산’ 사진이 말하지 않은 것들 ‘무릎 우산’ 사진의 첫인상은 아득할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앞에서 찍었다는 의 원본 사진에는 ‘꼭 이래야만 하는지…’라는 차분한 제목이 달렸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라는 듯이. 그러나 이미지의 의도는 빛의 속도로 초과 달성됐고, ‘황제 의전’이라는 작명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일부 언론은 ‘2021년, 이 정부가 인권을 말하는 순간’이라는 둥 문재인 정권으로 화살을 돌렸다.( 8월28일 1면 사진 제목) 이에 맞장구를 두드린 국민의힘 대선 후보들은 수행원한테서 황망히 우산을 받아 들거나 아예 비를 가리지 않는 연출로 정치적 반사이익을 꾀했다. 사진의 첫인상이 초현실적이었던 사정은 뒤늦게 감지됐다. 충북 지역의 한 언론이 사진 프레임 밖에서 벌어진 일들..
‘힙지로’의 카니발리즘 서울 중구 을지로 3·4가 일대는 요즘 ‘힙지로’라 불린다. 영어 ‘힙’(hip)과 ‘을지로’를 합친 표현이다. 국립국어원이 위키피디아처럼 운영하는 참여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을 보면, ‘힙하다’는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는 뜻이다. 고유함과 유행, 즉 신구 조화가 핵심이다. 이 뜻풀이에 힙지로만큼 잘 부합하는 곳도 드물다. 여느 ‘핫플레이스’와 달리 노포와 새 점포들이 잘 어우러져온 과정을 실증한 학술논문도 있다.(김은택 외, ‘인스타그램 위치정보 데이터를 이용한 을지로 3·4가 지역 활성화의 실증분석’, 20권 2호) 힙지로를 대표하는 곳으로 ‘노가리 골목’을 들 수 있다. 해가 지고 지하철 을지로3가역 4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별안간 들리는 야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