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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그래서 누구의 ‘자유’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폭포 세례와도 같았다. 양과 질 모두 그랬다. 16분 남짓 동안 35번 입에 올렸고, 대한민국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할 독보적 가치로 추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취임사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인 ‘하이쿠’처럼 언어 밖으로 탈주하려는 텅 빈 기표 같기도 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과 ‘세계 시민 여러분’에게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해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문할 뿐, 왜 자유가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도약과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혁신과 필연적 관계인지 따위에는 지극히 말을 삼갔다. 친절한 설명이 있어도 채워 넣기 어려운 그 광막한 행간은 결국 그가 5번 호명한 ‘여러분’ 몫으로 할당됐다.

 

하지만 각자 흩어져 따로 노는 저 파편적 개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돌연한 비약을 온전한 방정식으로 재구성하기란 애초 불가능해 보인다. 누구는 ‘반지성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우리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를 일갈했다고 읽고, 다른 누구는 자유 진영 중심의 국제 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지를 드러냈다고 읽는다. 팔할이 해몽이고, 나머지 이할은 인상평이다. 현실과 어긋나거나 까마득하게 멀다 해도 하등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가령,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스테펀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가 지난 1월 발표한 논문(‘한국은 민주주의 퇴행에 취약한가?’)을 보면, 지표로 나타나는 우리의 정치권리나 시민자유 등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조금 내려앉았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회복했다. 물론 1인당 국민총소득(GNI) 같은 경제지표가 그렇듯, 정치지표 또한 삶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관적 의지를 한껏 현실에 투사하다 별안간 ‘자유’를 만병통치약처럼 내놓은 건 뜬금없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이 몇번이고 ‘세계 시민’을 호명한 까닭은 자신이 제시한 솔루션이 국제사회에도 소구되기를 바라서였을 터이다. 그러나 이 또한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한 오늘의 각국 또는 국제 정세 흐름과 확연히 동떨어져 있다. 30년 넘게 시대를 풍미해온 신자유주의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신호탄으로 쇠락의 길로 들어선 뒤, 그 자리를 대신할 좌우의 헤게모니 싸움은 크게 포퓰리즘과 보호적 신국가주의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파올로 제르바우도, <거대한 반격>)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된 영국의 브렉시트를 비롯한 우파적 양상과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영국의 제러미 코빈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부상 모두 포퓰리즘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좌파와 우파는 사회를 보호하느냐, 아니면 유산자를 보호하느냐를 두고 대립하지만, 둘 다 국가의 개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호적 신국가주의의 특성을 공유한다. 신자유주의는 양쪽 모두에 적이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아니다. 폭력적 기세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황혼기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소싯적에 밀턴 프리드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저서를 읽은 것을 긍지로 내세우는 윤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자본의 자유가 성장으로 이어져 만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교리가 어른거린다. 그러나 ‘여성가족부 폐지’에서 보듯, 대선 캠페인에서 보여준 그의 포퓰리즘은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이런 이율배반이 그의 취임사를 ‘근엄한 농담’으로 읽히게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김수영, ‘푸른 하늘을’). ‘피의 냄새’는 자유가 절로 주어지는 시혜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장자크 루소의 자유에 대한 전제조건인 ‘일반의지’는 무한한 정보력과 탁월한 판단이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 남성 부르주아지를 주체로 한정했다. 자유주의 안에는 필연적인 ‘비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숭고한 파토스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일관된 언행으로 볼 때, 누군가는 피를 흘리지 않으면 비자유의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두려움은 부질없는 망상이 아니다. 우리는 취임사를 해석하지 말고, 물어야 한다. 그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42599.html

 

[아침 햇발] 그래서 누구의 ‘자유’인가

안영춘 |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폭포 세례와도 같았다. 양과 질 모두 그랬다. 16분 남짓 동안 35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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