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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비문명’의 역습이 시작됐다

21일 아침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서울 지하철 3호선 열차 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 싸움은 어떻게 끝날까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 박경석의 휠체어를 미는 활동지원사이자 전장연 활동가인 그가 팔을 뻗어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답하는 순간, 내 잔이 흘러넘쳤다. 30대 중반 한창나이인 그의 눈 밑으로는 다크서클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끝날까’는 ‘언제 끝날까’이기도 한 눈치였다. 활동가들은 초인적인 의지로 넉달째 과로를 버티고 있다고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어록에서 한 문장을 빌려 와 격려를 대신한다. “내 지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내 의지는 낙관주의적이다.”

 

각주를 달면 이렇다. ‘이 싸움’을 뭐로 보느냐에 따라 답도 완전히 달라진다. ‘장애인 권리예산’에 대한 대통령 당선자 쪽의 약속을 받아내는 싸움이라면, 지금의 과로에 쉼표를 찍는 일은 그쪽의 답변에 달렸다. 유감이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패한 건 아니다. (평화주의에 반하는 뉘앙스지만) 전투에 지고 전쟁에 이기는 경우도 많다. 길게 보면 이미 이기고 있는 싸움이다. 단군 이래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가장 뜨거운 작금의 현상은 거대한 변화의 징후다. 일시적 반동이 와도 원점으로 회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얘기를 조금 길게 해보려 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비문명적’이라고 했다. 한갓 말장난 같지만, 진실은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적힌다고 했던가. 이준석의 ‘비문명’은 진실을 품은 소문자다. 그는 한국식 능력주의의 아이콘이다. 아득한 젠더 격차를 공정성의 거푸집에 욱여넣어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주조했던 그가 전장연을 다음 타깃으로 삼은 건 우연일까. ‘경쟁’은 능력주의의 신성불가침한 가치다.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의 책 제목(<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대로, 장애인들은 경쟁의 실격자로 간주된다.

 

능력주의와 문명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여기에 과학의 외피를 씌운 것이 사회진화론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처럼 인류 또한 끝없는 경쟁을 통해 적자만 살아남고, 그것이 사회가 진보하는 길이라고 믿는 사상이다. 약육강식, 우승열패 등이 핵심 강령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가 구한말 사회진화론자들에 대해 “조선인들도 하루빨리 일본인 못지않게 ‘문명인’이 되기를 바랐다”며 “약자를 당연히 도태시키는 ‘힘’에 입각한 ‘문명’이 새로운 지배적 이야기가 된 것”이라고 짚은 데서도 이 삼각관계가 또렷하게 그려진다.(<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인종주의, 우생학, 나치즘 같은 20세기의 섬뜩한 이름들에도 모두 이들의 유전자가 들어 있다. 특히 인간의 ‘비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가 마침내 지구별에 기후 위기를 불러온 것을 가리키는 ‘인류세’라는 오늘의 지질시대 개념은, 고귀한 아우라를 두르고 긴 시간 영광을 누려온 ‘문명’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다. ‘거대한 전환’을 다급하게 요구받고 있는 현실에서 문명은 인류라는 특권층이 떠벌리는 앙시앵레짐(구체제)의 자기변명이 돼가고 있다. 이준석의 말장난 같은 소문자가 폭로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과학기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인류세 대신 ‘쑬루세’라는 대안적 개념을 제안한다.(<트러블과 함께하기>) 쑬루세는 그가 만든 말인데, 땅속 무기물까지 아우르는 모든 존재들 사이의 ‘촉수적 연결’을 뜻한다. 이 개념에서는 인간도 이들과 연대해 살아가야 하는 엔(n)분의 1이다. 또 한 사람, 장애운동가이자 동물운동가인 수나우라 테일러는 인간중심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가 어떻게 연장돼 공통의 억압으로 작동하는지를 촘촘히 논증한다.(<짐을 끄는 짐승들>) 두 사람이 마주하는 자리가 오늘날 장애인운동의 좌표다.

 

장애인운동은 여전히 당사자 운동이지만 더는 부문 운동에 머물지 않는다. 이동권, 탈시설, 돌봄 지원, 권리예산, 노동권에 대한 요구 하나하나가 곧 보편적인 운동이다. 나아가 대전환으로 이행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벌이는 전면전이다. 쉽게 끝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선자 쪽은 장애인 권리예산 요구에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전장연은 답변을 기다리며 잠시 접었던 출근길 지하철 타기를 21일 다시 시작했다. 약자가 세상 모든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연대의 요청이다. ‘비문명의 역습’이 시작됐다.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9884.html

 

[아침 햇발] ‘비문명’의 역습이 시작됐다 / 안영춘

안영춘 | 논설위원 “이 싸움은 어떻게 끝날까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 박경석의 휠체어를 미는 활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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