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269)
광장을 바라보는 언론의 ‘불온한’ 시선 직접민주주의 실현하는 ‘정치공간’서 ‘정치’를 금하다 서울시청 앞을 광장으로 만드는 상상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거치면서 무르익었다. 연인원 2천193만명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열정의 붉은 축제가 깊게 잠들어 있던 광장의 욕망을 들쑤셨다. 문화운동가들이 광장 조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나도 열심히 기사를 썼다. 2004년 5월 1일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서울광장을 준공하고, 머릿돌을 세웠다. “그때의 열정과 감동을 간직하기 위해 시민의 뜻을 모아… 이곳이 통일의 환호로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서울광장을 만들어 시민에게 바칩니다.” 지금 서울광장은 닫혀 있다. ‘차벽’으로 접근은 물론 조망까지 차단하는 것만이 ‘폐쇄’는 아니다. 몇몇 관제 문화행사가 아니면 사용 허가를 내주지도 않고, 집회신고도 받아주..
들어는 보셨습니까, 미디어위? 여당 추천 위원들 식물조직 되고, 일부 신문들 애써 눈감고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미디어위)라는 국회 내 사회적 논의기구가 있다. 지난 3월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구성돼 100일간의 활동에 들어갔다. 탄생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언론노조의 두 차례 총파업과 시민들의 여의도 촛불집회, 국회 안에서의 몸싸움 등이 먼저 있었다. 혹한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건 한나라당이 강행처리를 시도한 이른바 ‘미디어 관련법’들이다. 여러 법안에 걸쳐 있는 쟁점을 간추려보면, 대기업과 신문의 지상파 및 종합편성채널 진입 허용 여부로 좁혀진다. 한국사회 여론다양성의 식생을 좌우할 결정적인 내용이다. 미디어위 위원들은 국회라는 정파적 의사결정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들 법안에 대한 국민의견을 수렴해 합의안을 도출하라는 무거운 ..
상복보다 더 시키먼 조중동K의 속내여 ※ 이 글은 제763호(2009.06.05)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대형 특별기획 표지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저는 그동안 외부에 발표한 글에 대해서는 해당 매체 인터넷이 기사를 공개하고 나면 와 제 블로그에서 ‘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지만, 이번 글은 ‘발행’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6월4일 오후 에 톱기사로 걸려서, 같은 글 하나를 놓고 세 곳에서 ‘노출’하는 것이 민망해졌기 때문입니다. [표지이야기-분노의 기억] 족벌언론과 관제방송 KBS의 ’애도 저널리즘’…타살 공범관계 뒤덮으려 ‘탈정치’ 덧칠하다 당신은 슬프던가? 제호 아래, 5월의 폭우를 맨몸으로 맞고 선 봉하마을 추모객들의 먹물 같은 표정 사진은 당신 심장 안으로 삼투압되던가? 호외판 1면 가득 실린 망자의 얼굴 사진을 보며, 30m..
슬픔 그 이상을 금지하는 ‘애도 저널리즘’ 주류언론이 자살을 다루는 ‘이기적’ 방식들 주류 언론이 자살을 다루는 방식은 대상과 성격에 따라 갈린다. 이름 없는 사람이 지하철에 몸을 던졌을 때는 사건 발생 개요에 이어 한 문장으로 된 자살 동기 분석과 역시 한 문장으로 된 열차 지연 사실을 병렬 배치한다. 자살 동기는 철저히 ‘개인화’된다. 생활고 비관, 성적 비관 같은 사유에 대해 사회적 맥락을 짚는 일은 드물다. ‘사회화’되는 것은 오직 공중의 피해(열차 지연)뿐이다. 택배 노동자 박종태씨 자살 보도도 이 프레임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 자살자가 유명 연예인일 때는 보도 전체에 상업주의가 관통한다. 조문 오는 동료 연예인들 모습 사진 한 장 한 장이 뉴스가 된다. 이른바 ‘조문 저널리즘’이다. 자살 동기와 관련해서도 온갖 추론이 쏟아지고, 이들 ..
‘피디 저널리즘’ 얕보는 ‘기자 저널리즘’께 그 차별과 배제의 인식론이 갈수록 초라해지는 현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기자 저널리즘’과 ‘피디 저널리즘’이라는 개념 구분이 있다. 구분이란 비교를 거쳐 그 차이점을 도출한 뒤 카테고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텐데, 나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 기자가 하면 기자 저널리즘이고 피디가 하면 피디 저널리즘이라는 정도라면 굳이 구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짐작가는 대목이 없진 않다. 이런 구분은 기자 저널리즘은 ‘기록’을, 피디 저널리즘은 ‘연출’을 중시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 경향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다. 신문 기사나 방송 리포트는 분량이 짧다보니 사실관계만 압축해 전하는 기법이 발달했다. 이에 견줘 방송 시사 프로..
애마부인과 표현의 자유 방송 저널리즘의 연성화, 탈정치화와 정치적 투항의 경계 박찬욱 감독의 가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예전 같으면 언론은 본선 진출만으로도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이젠 그랑프리 정도는 먹어야 아드레날린을 분출한다. 그만큼 한국영화의 위상이 높아졌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역설적으로 80년대 계열의 ‘방화’가 밑절미가 됐다. 애마부인 연작은 성애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저항을 포기한 영화계의 음울한 엑소더스였다. 표현에 대한 욕망은 지각 아래에서 에너지로 다져졌고, 때를 만나 지각 위로 솟아 폭발하듯 꽃을 피웠다. TV 시사 다큐멘터리가 연성화한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가장 지배적인 현상은 탈정치화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의 잇단 스포츠 스타 성공기가 대표적이다..
‘야마’의 맛 ‘야마’가 ‘팩트’보다 선행하는 한국 저널리즘의 풍경 일본말 ‘야마’는 우리말 ‘뫼’(山)와 같다. 일본 영화 을 보면 “야마요 야마요~”를 되풀이하는 이른바 ‘야마요 송’이 나오는데,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율동이 모두 산 모양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 ‘야마’가 몇가지 은어로 자리잡았다. ‘야마 돈다’는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철공소에서는 나사의 톱니 마루 부분을 ‘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야마’를 언론계만큼 자주, 또 ‘심오’하게 쓰는 집단도 없는 것 같다. 기자들끼리 업무와 관련해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 “팩트가 무엇이냐”와 “야마가 무엇이냐”다. 여기서 말하는 ‘야마’는 ‘기사의 주제와 문제 설정’ 쯤에 해당하는데, 이렇게 정색하고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멋쩍을 만..
언론의 위기, 벼랑 끝에 선 한국 민주주의 미디어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한 인식전환을 제안함 이 글은 5·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격월간지 특성상 글이 깁니다(200자 원고지 70매). 쉬엄쉬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붕어빵에는 붕어 비늘 하나 들어 있지 않고, 칼국수를 삼키더라도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일은 없다.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은 푸름의 가치(생태/평화/공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빨주노초파남보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은 색도(色度)의 관형어일 뿐이다. ‘녹색’이라는 관형어의 부채꼴 양쪽 끝은 아득히 멀다. 녹색과 민족주의 우생학이 만나면 인종대청소의 이데올로기인 나치의 ‘에코파시즘’이 태어나고, 녹색과 안전에 대한 이기적 집단욕망이 결합하면 공해산업 국외덤핑 같은 제1세계의 ‘에코임페리얼리즘’이 번창한다. 이들 둘의 공통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