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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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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반일’, 과거의 ‘친일’ 발간을 둘러싼 낯선 풍경에 대한 해명 발간 소식을 전하는 언론 보도를 보면서 몇 가지 다른 풍경이 눈앞에서 겹쳤다. 해마다 3월이면 신문 1면을 장식하는 3·1절 기념행사 장면과 독도 문제를 비롯해 이른바 일본의 ‘망언’이 있을 때마다 벌어지는 규탄 집회 장면이었다.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는 3·1절 기념행사는 몇 해 전부터 보수 기독교단체 등이 주도하고 있는데, 신문을 보면 매번 그들 손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펄럭인다. 일본대사관 앞을 무대로 펼쳐지는 일본 망언 규탄 집회에서는 주로 군(軍) 관련 단체들이 산 닭의 목을 비트는 것도 모자라 돼지 멱을 따기도 한다. 이들 셋은 ‘반일’이라는 분모를 공유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런데 발간 문제 앞에서는 태도가 갈린다. 3·1절에 성조기를 펄럭이는 집단과 일본대..
부마항쟁을 잊고 박정희를 숭배하다 ※ 이 글은 한국판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무관심 속 30주년 기념 심포지엄… 오늘의 한국 사회에 시사점 양자는 모순대당 관계…‘힘의 욕망’ 벗어나야 박정희 극복 가능 부마민주항쟁은 사람 몸의 꼬리뼈와 같다. 퇴화기관이라는 말이다. 지난 10월 16일은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온갖 상수학적 마케팅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부마항쟁 30주년에 관한 사회적 환기는 묵상에 가까웠다. 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열흘 뒤 10·26 사태가 터졌다.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일주일도 채 안 돼 자신의 심복 김재규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30년이 지난 지금, 부마항쟁은 흔적만 남은 꼬리뼈처럼 잊혀지고, 박정희는 숭배의 대상으로 되살아나 있다. 그리고 박정희의 부활을 이해하는..
‘전향’마저 과분한 당신들의 대한민국 ※ 이 글은 한국판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변절, 적대적 공생 위한 기회주의의 낙인찍기 호명 선민의식 젖은 전향자들 민족주의·애국주의로 귀착 경제학자 정운찬은 변절자인가라는 물음은 논쟁적이다. 정운찬의 이명박 정부 총리 입각을 두고, 적지 않은 이들이 ‘변절’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운찬의 선택에서 나름의 내적 ‘일관성’을 발견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어느 여성 언론인은 “2007년 한나라당에서 ‘정운찬이야말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손색이 없다’ 했는데 딱 들어맞았다”고 했다.(1) 그는 정운찬이 서울대 총장을 하면서 부자를 위한 삼불제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2007년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할 때도 진흙탕 속에 들어갔다 발에 흙 한 점 안 묻히고 나오려 했다고 평가했다. 사실에 어긋나는 대..
미디어계의 리바이어던이 출현한다 헌재 결정으로 출현하게 된 ‘종편’이 지상파보다 무서운 이유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미디어 법안 처리의 위법성과 법안 자체의 유효성을 동시에 인정함으로써 법 해석의 미학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해석이 없는 법은 박제와 같다. 그 많은 법조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법이 해석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속성 덕분이다. 그래서 “법대로 하라”는 말은 발화자에게 아무런 정의(正義)의 실체적 준거를 돌려주지 않는다. 다만 헌재의 이번 결정이 유별난 건 모순을 지양하지 않고 일거에 초월해버리는 놀라운 영감에 있다. 법학의 범주를 넘어 가히 초현실주의적 미학의 경지에 이른 셈이다. 헌재의 결정으로 한국의 미디어 시장은 이제 자본의 각축장으로 돌입할 수 있는 헌법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이 법안이 미칠 파장과 관련해 그동안 ..
사람 목숨을 버리는 저널리즘은 없다 학교순위 공개에 가린 저널리즘의 신화 당신이 우연히 참사 현장을 목격한다면 사람을 구하겠는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겠는가? 초보 기자 시절, 선배로부터 한 번쯤 들어보는 물음이다. 전형적인 딜레마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인들은 아주 깔끔하게 ‘선택’하는 것을 배우고, 이를 내면화한다. “인명 구조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취재·보도는 당신 말고 할 사람이 없다.” (지금도 똑같은 말을 주워섬기는 것은 시대착오다. 참사현장에는 이미 수많은 ‘폰카’가 있을 테니까.) 모든 물음에는 가치가 전제돼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온전히 신뢰하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는 ‘가치중립적인 물음은 없다’는 것도 포함된다.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가 ‘문제 설정’을 강조한 것도, 거칠게 풀이하면, 물음 안에 이미..
누가 김제동을 잘랐을까? 정치권력의 압력만으론 부족…방송사 내부 적극적 부역 주목 연예인 김제동의 인기는 그의 작은 눈과 토끼 이빨에서 나온 게 아니다. 지금 KBS 사장이 언론계에서 욕을 들어먹는 이유가 그의 2대8 가르마에 있지 않듯이. 내 눈에 김제동은 한국 예능프로그램 진행자 가운데 재치와 순발력에서 가장 뛰어나다. 유재석과 강호동은 다른 출연자와의 관계·소통 방식이 요즘 방송 포맷에 잘 맞아떨어질 뿐, 프로그램을 이끄는 개인적 재능에서는 김제동에 크게 못 미친다. 그리고 김제동의 재능은 의식과 동행한다. “방송은 시청자 여러분의 것”이라는 방송사들의 입에 발린 말을 곧이듣지 않더라도, KBS가 김제동을 하차시킨 것은 반 시청자적 행태이기 전에 자해적 행위다. “우리 방송 우리가 망가뜨리겠다는데 뭔 상관이냐”는 말은, 적..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남성적 시선 낭자한 신체적 상해에 반응하는 선정주의와 소유권 침해에 대한 피해의식 요즘 딸아이의 최대 관심사는 이른바 ‘조아무개 사건’이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검색창에 피해 소녀 이름 두 글자부터 입력한다. 어린 그녀에게 또래가 겪은 이 사건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엄혹한 실존의 문제이겠거니 싶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그녀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녀가 겨우 두려움을 추스르는 사이, 언론은 상습 성폭행범에 대한 ‘생화학적 거세’(약물을 주입해 성욕을 없애는 시술) 필요성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한국 언론이 성폭력 문제에 이토록 ‘급진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 언론은 성폭력 가해자에게 관대했다. 여기자를 성추행한 최연희 의원이 의원직을 붙들고 ..
누군가의 ‘추억’은 다른 누군가의 ‘아픈 기억’ 언론의 ‘선택적 추억’ 감상하기 인간은 모든 것을 추억하지는 않는다. 추억은 무언가를 과거형으로 송별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의미로 불러내는 행위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그 무엇을 환기시키는 욕망의 격발 장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격발 장치는 다분히 현재형이다. 영화 문법으로 말하자면, 추억은 현재가 과거를 불러낸 시퀀스다. 얼마 전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가 에 쓴 칼럼 제목은 ‘사찰의 추억’이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의혹과 관련한 글이었다. ‘추억’이 낭만성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라면 이 제목에서 추억의 주체는 곧 ‘사찰’의 주체다. 사찰을 당했거나 사찰을 목격한 이가 사찰을 낭만적으로 추억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 에서 추억의 주체는 영화 속에서도 끝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