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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사람 목숨을 버리는 저널리즘은 없다

학교순위 공개에 가린 저널리즘의 신화

당신이 우연히 참사 현장을 목격한다면 사람을 구하겠는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겠는가? 초보 기자 시절, 선배로부터 한 번쯤 들어보는 물음이다. 전형적인 딜레마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인들은 아주 깔끔하게 ‘선택’하는 것을 배우고, 이를 내면화한다. “인명 구조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취재·보도는 당신 말고 할 사람이 없다.” (지금도 똑같은 말을 주워섬기는 것은 시대착오다. 참사현장에는 이미 수많은 ‘폰카’가 있을 테니까.)

모든 물음에는 가치가 전제돼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온전히 신뢰하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는 ‘가치중립적인 물음은 없다’는 것도 포함된다.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가 ‘문제 설정’을 강조한 것도, 거칠게 풀이하면, 물음 안에 이미 답이 구조화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참사 현장에서의 선택에 관한 물음 안에는 다음과 같은 저널리즘의 절대성 신화가 내장돼 있다. 그는 오로지 보고, 기록한다, 절대적 가치중립 위에서. (믿거나 말거나.)

이런 신화는 기자는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기록해야 한다는 산상수훈으로 연장된다. 사람 목숨과 바꿔가며 취재한 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보고 듣고 아는 것을 모두 기록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 않을 때도 많다. 저항군 지도자를 인터뷰하고 나서 그의 은신처를 보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조선일보>가 얼마 전 전국 고등학교의 수능 성적 순위를 공개한 것은 어떤가?

일전에 이 지면에서 한국 교육의 압도적 특성을 ‘미래 자원에 대한 현재의 쟁탈전’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공교육이라는 공유재가 사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무한경쟁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에 늘상 시달리고 있다. 수능 순위 공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이 나라가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라는 헌법 정신을 구현하려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는 게 고교 평준화다. 조선일보는 수능 순위를 공개하면서 이 남루한 제도를 공격하고 나섰다. 조선일보의 논리는 완전하게 평등해지지 못할 바에는 아예 평등의 가치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언어도단에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보고 들었으니 기록해야 한다’는 자의적 직업 규범이다. 무조건적으로 취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공개하라는 규범은 정작 특정한 목적에 의한 지극히 의도적인 선택 행위를 분식하고, 결과에 대한 한도 무제한의 면죄부를 주고 있다. 진실만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기대한다면 초보 기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을 이렇게 바꾸는 게 옳을 것이다. “사람도 구하고, 취재해서 기사도 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물론, 정답은 없다. 끝없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물음이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60호(2009-10-26)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