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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누군가의 ‘추억’은 다른 누군가의 ‘아픈 기억’

언론의 ‘선택적 추억’ 감상하기

인간은 모든 것을 추억하지는 않는다. 추억은 무언가를 과거형으로 송별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의미로 불러내는 행위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그 무엇을 환기시키는 욕망의 격발 장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격발 장치는 다분히 현재형이다. 영화 문법으로 말하자면, 추억은 현재가 과거를 불러낸 시퀀스다.

얼마 전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가 <한겨레>에 쓴 칼럼 제목은 ‘사찰의 추억’이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의혹과 관련한 글이었다. ‘추억’이 낭만성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라면 이 제목에서 추억의 주체는 곧 ‘사찰’의 주체다. 사찰을 당했거나 사찰을 목격한 이가 사찰을 낭만적으로 추억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추억의 주체는 영화 속에서도 끝내 확정되지 않은 ‘살인자’다.)


누군가의 추억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픈 기억’일 수 있다. 과거의 한 사태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연히 구분되는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가해자의 추억 행위는 자칫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려는 퇴행적 의지로 표출될 수 있다. 최근 국군기무사도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징후가 너무 뚜렷했다. 앞서 검찰은 방송 시사프로그램 구성작가의 7년치 이메일을 (합법적으로) 뒤지기도 했다.

사찰은 특정인을 감시하는 것이지만, 그 효과는 특정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원형감옥)과 같은 이치다. 파놉티콘은 감시탑 위의 간수 한 사람이 감방 안의 죄수 전원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다. 죄수들은 간수를 보지 못한다. 간수가 없어도 죄수들은 자기검열로 스스로를 통제한다. 이를테면 파놉티콘은 공간 기획을 넘어선 심리 기획이다. 감시사회는 그렇게 작동한다. 누군가는 그 시스템을 ‘추억’하고 있고, ‘재현’하려 하고 있다.

이른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였다. 체제 전복을 위해 친구의 자살을 부추기고 유서까지 대신 써줬다며 강씨를 파렴치한으로 만든 사건의 진실이 18년 만에 다시 가려지게 됐다. 이 경우 가해자는 당시를 별로 추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가해자의 자의적 추억을 사법부가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법부에는 못 미치겠지만, 언론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조용하기만 하다.

일부 언론이 조용한 것은 그 추억에 자신들도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수사 단계에서 확정 판결 수준으로 대서특필하던 그들이었다. 사찰에 대해 그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쉽다.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범이 잡혔다면 현실 속 진범은 그 영화를 감미롭게 ‘감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57호(2009-09-28)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