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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남성적 시선

낭자한 신체적 상해에 반응하는 선정주의와 소유권 침해에 대한 피해의식
 

요즘 딸아이의 최대 관심사는 이른바 ‘조아무개 사건’이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검색창에 피해 소녀 이름 두 글자부터 입력한다. 어린 그녀에게 또래가 겪은 이 사건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엄혹한 실존의 문제이겠거니 싶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그녀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녀가 겨우 두려움을 추스르는 사이, 언론은 상습 성폭행범에 대한 ‘생화학적 거세’(약물을 주입해 성욕을 없애는 시술) 필요성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한국 언론이 성폭력 문제에 이토록 ‘급진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 언론은 성폭력 가해자에게 관대했다. 여기자를 성추행한 최연희 의원이 의원직을 붙들고 있을 때나 다음 선거에 출마했을 때, 집요하게 이 문제를 건드린 언론은 극히 드물었다. 법원은 벌금 500만원 형을 선고해 그의 정치생명을 지켜줬고, 그는 18대 국회 입성에도 성공했다. 언론과 국가권력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3차 폭력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1980년대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 이들은 성고문 피해 여성에게 “성을 혁명도구화 했다”며 정절 이데올로기와 안보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휘둘렀다.

단언컨대, 언론이 조아무개 사건에서 방점을 찍은 지점도 ‘성폭력’은 아니다. 언론이 흥분하는 이유는 우선 범죄 피해가 너무 낭자하기 때문이다. 피해 여성의 신체적 상해가 처참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선정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면, 이 사건은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어린 소녀라는 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남성의 시선을 대변하는 언론에게 피해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누군가의 ‘딸’이다. 성 정치학적으로 볼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재현되는 어머니, 아내, 딸은 독립된 성적 주체가 아닌 남성의 탈성화된 소유물이다. 이때 성폭력 범죄는 절도죄나 손괴죄의 성격으로 바뀐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조아무개 사건도 국회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이나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다르지 않다. 본질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다. 이들 폭력을 사적 소유관계의 문제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폭력의 은폐는 모럴 헤저드가 아니라 일상을 지배하는 모럴이 된다. (가정 폭력을 집안 문제로 덮어두려는 것과 같다.) 청소년들의 집단적이고 반복적인 성폭력을 지역사회가 쉬쉬 하고, 성폭력 교수는 감싸면서 피해 여학생에게 폭로의 죄를 묻고, 한국의 성폭력 신고율이 세계 최저 수준인 현실이 들려주는 얘기도 바로 그 지점이다.

언론이 떠드는 것처럼 성폭력범에게 전자발찌를 채워 격리수용을 하든, 생화학적 거세 시술을 하든, 딸아이의 불안은 여전히 실존의 문제로 남을 것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남성의 소유권이 아니라 폭력을 당한 여성이라는 빤한 진실을 남성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안영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58호(2009-10-12)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