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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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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의 약발도 소멸한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이미 만신창이다. 15일 개시된 공식 선거운동은 오랜 정치적 내전 상태에서 뒤늦게 나온 선전포고처럼 뜬금없어 보이고, ‘공약으로 승부하라’는 지당한 주문은 작렬하는 포탄 앞에서 평화선언을 주창하는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으로 들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20대 대선이 역대 최악의 적대적 선거로 흐르고 있다는 데 이론을 찾기 어렵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귀엣말의 외설로 기억되던 1992년 대선마저 어느덧 ‘인지상정’의 미담 설화로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알다시피 이번 대선의 적대성을 상징하는 대표 집단은 ‘이대남’(20대 남성)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단문 메시지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면서 대선 판세를 일거에 흔들어놓은 장본인들로 지목된다. 전체 유권자의 6.7%에..
전화 도수제와 ‘용건만 간단히’ ‘전화 도수제’는 발신 통화 횟수에 따라 요금을 매기는 제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외전화를 하려고 우체국에 찾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통화가 끝나면 창구 직원이 몇 도수가 나왔다고 일러주고 요금을 받았다. 지금도 도수제는 공중전화에 골격이 남아 있다. 한번 전화를 걸 때마다 먼저 기본요금을 투입하고,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끊어도 남은 시간 차액이 환불되지 않는다. 1896년 경복궁 내부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전화 역사를 보면, 공중전화 말고도 몇차례 도수제가 도입돼 운영되고는 했다. 1937년 7월1일 경성국에서 가입자 5000명 이상인 지역에 한해 전화 사용료를 기본료와 도수료로 구분해 징수한 것이 첫 기록이다. 미군정 때인 1948년 6월1일 시행된 군정법령 제2036호는 1급지에 대해 ..
‘여가부 해체’와 ‘멸공’이 말하지 않은 것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말은 극단적으로 짧았다. ‘설화’를 줄이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 아닐까 짐작도 해봤다. 그러나 훨씬 강력한 쓸모는 상대의 말문을 막는 것이었다. 윤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의 뜻을 묻는 기자들에게 “뭐든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엉터리없는 동문서답이 아니다. 더는 묻지도, 답변을 기대하지도 말라는 거다. 그리하여 ‘여성가족부 폐지’는 설명 따위 필요 없는 암기과목의 단답형 정답이 됐다. 문제는 그 정답이 누구에게 제출됐는가다. 빨간펜은 ‘이대남’이 쥔 모양새다. 말이 잘려나간 자리는 ‘밈’(meme·인터넷에 퍼뜨리기 위해 연출한 이미지물)으로 채워졌다. 윤 후보가 멸치와 콩으로 몸소 시전했다. 밈의 순기능은 ‘풍자’다. 쓰..
신지예의 ‘정체성 정치’ “특정 종교, 민족, 사회적 배경 등을 가진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광범위한 기반의 정당정치에서 탈피해 배타적인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경향이다.” ‘정체성 정치’에 대해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사의 웹 사전 ‘렉시코’(Lexico)가 내린 정의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의 대표적 하위 범주인 ‘젠더’가 예시에서 빠져 있어 아쉽다. 대신 ‘배타적’이라는 표현을 써서, 정체성 정치가 빠질 우려가 있는 함정이 뭔지 암시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들에게 유력한 정치투쟁 수단이다. 이들은 기성 정치체제로는 대의되지 못하는 정체성을 억압의 경험을 통해 공유하고, 억압에 맞서 연대한다. 다만 두 개의 다른 정체성 사이에 오직 소수자라는 이유로 보편적 지평이 열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우리)의 고통은 오직 ..
‘종내 차별주의자’인 어느 반려인 ‘쾌고감수능력’(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동물권 운동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영어로는 ‘sentience’인데, 일반적으로 감각성이나 지각력을 가리키는 이 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가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다. 싱어는 (1975)에서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동물종에는 공리주의의 원리인 ‘이익평등고려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리주의에서 고통은 그 자체로 이익에 반하는 것이므로, 인간과 동물 할 것 없이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근대 휴머니즘이 정작 비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종 차별주의’나 다름없음을 일깨운다. 인간의 동물 단백질에 대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공장식 축산이 만연하고, 지적 호기심이나 질병..
‘손발 노동’의 인간학 카를 마르크스가 인간을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존재’라고 한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수사만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공통점과 차이점), 인간과 인간(사회)의 관계 차원에서 숙고했고,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존재’라는 답을 내놓았다. 정치경제학이기 전에 인간학적 혹은 인류학적 탐구 결과라 할 수 있다.(죄르지 마르쿠스 지음, 정창조 옮김, 참조) 동물의 활동은 주어진 자연적 대상을 선천적인 욕구에 맞춰 점유하고 소비하는 데 국한된다. 물론 동물도 둥지 같은 것을 짓지만, 직접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소비한다. 이와 달리, 인간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 새롭게 능력을 발전시키고, 욕구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인간의 노..
탈진실 시대의 ‘무지’와 ‘무시’ ‘무지’와 ‘무시’는 획 하나만 다르지만, 뜻이 가깝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남’(타자)과 ‘님’의 관계처럼, 우연히 표기만 닮은 거라 여겨진다. 영어 ‘ignorance’(무지)와 ‘ignoring’(무시)을 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표기만 닮은 게 아니다. 동사 ‘ignore’는 ‘무지하다’와 ‘무시하다’의 뜻을 모두 갖고 있다. ‘모르는 것’과 ‘알은체하지 않는 것’은 뿌리가 닿아 있다는 듯.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모른다고 할 때, 그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철학자 낸시 튜어나는 무지를 4개 영역으로 나눴다. ①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②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③ (특권을 가진) 타인의 바람 때문에 모르는 것, ④ 의도적인 무지(레테나 샬레츨 지음,..
‘시대적 특혜’라는 외설 김현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 후보자가 자기 소유 부동산 네 채를 두고 “시대적 특혜”라고 했다기에, 그와 나의 시간대가 얼마나 겹칠까 문득 궁금해졌다. 교집합이 꽤나 컸다. 공범 의식이 주입된 탓인지, 쑥덕공론 한번 못 해보고 그의 사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박은경 전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신파극 속 ‘행인 1’이었다면, 무려 시대를 호명한 김 후보자는 대하드라마의 히로인이었다. 비슷한 ‘시대적 특혜’를 누렸을 여권 정치인들을 비꼬았던 것이 ‘내로남불’의 덫에 걸려 드라마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시대를 볼모 삼은 그의 대사는 분명 잔망스러울 만치 영리했다. 김 후보자는 퇴장했으나, 그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