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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이대남’의 약발도 소멸한다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며 성평등과 공존을 외치는 청년 남성들이 모인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성별과 세대의 갈라치기를 비판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대 대통령 선거는 이미 만신창이다. 15일 개시된 공식 선거운동은 오랜 정치적 내전 상태에서 뒤늦게 나온 선전포고처럼 뜬금없어 보이고, ‘공약으로 승부하라’는 지당한 주문은 작렬하는 포탄 앞에서 평화선언을 주창하는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으로 들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20대 대선이 역대 최악의 적대적 선거로 흐르고 있다는 데 이론을 찾기 어렵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귀엣말의 외설로 기억되던 1992년 대선마저 어느덧 ‘인지상정’의 미담 설화로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알다시피 이번 대선의 적대성을 상징하는 대표 집단은 ‘이대남’(20대 남성)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단문 메시지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면서 대선 판세를 일거에 흔들어놓은 장본인들로 지목된다. 전체 유권자의 6.7%에 불과하지만 결정적 캐스팅보트를 쥔 것으로 평가되자 정치적 존재감은 하늘을 찌른다. 윤석열 후보는 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극우적 적대 의식을 부추기는 단문 메시지를 잇달아 내놓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이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다 스텝이 꼬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대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의외로 답하기 어렵다. 얼마 전 <중앙일보> 조사 결과를 보면, 이대남은 전체 연령별·성별 집단 가운데 정책 이념이 가장 보수적이었다. 반면 20대 여성은 진보 상위권에 들었다.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온 20대가 젠더 변수 앞에서 양분된 것도 모자라, 남성은 우경화로 치달은 것처럼 비친다. 하지만 지금의 이대남도 지난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전까지는 전체 유권자 평균에 수렴되는 투표 성향을 보였다. 요컨대 이대남은 극히 최근에 출현한 ‘현상’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젠더 전체를 아우르는 20대의 특성과 그 특성이 형성된 과정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이들은 ‘절차적 공정성’을 대단히 중시하는 세대다. 한국 경제에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두 그늘이 동시에 드리운 데서 강한 영향을 받은 거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기회가 쪼그라들자 공정 경쟁의 가치를 깊숙이 내면화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큰 사회적 파장을 낳은 일련의 젠더 사건을 경험하면서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을 공정성의 적으로, 자신을 페미니즘의 피해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널리 확산됐다는 분석이 더해진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이대남에 대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기존의 카테고리에 배치하기 어려운 특성이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다. 몇해 전 연구 결과이기는 하나, 20대 남성은 30대 여성보다 성평등 의식이 강했다. ‘성평등 의식이 강한 반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지난해 <한국방송>(KBS)의 ‘세대인식 집중조사’에서는 모든 세대·성별에서 자신을 고소득층으로 여길수록 이타성이 높게 나타났는데, 20대 남성만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현상’으로서의 이대남은 뚜렷한 반면 ‘형상’은 모호하고 ‘실체’는 흐릿하다. 이거야말로 이대남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 단서인지 모른다. 몇몇 단서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볼 수도 있다. 높은 성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반페미니즘 성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서에 분열적인 단층면이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20대 남성 내부는 적어도 경제적 사정이 단일하지 않고, 고소득층일수록 이타적 태도가 약하다는 건 고소득층의 배타성이 전체를 과잉대표할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런 20대 남성들의 특성을 꿰뚫고 요령껏 이용하는 정치인이 바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다. 그가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밀었던 유승민 전 의원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가장 먼저 치고 나왔다. 윤석열 후보의 단문 메시지도 그의 작품일 터이다. 그런데 이대남을 너무 믿는 건 아닐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해 11월 실시한 대국민 조사에서 20대 남녀는 청년세대 공통 이슈로 최저임금, 주거금융 지원, 청년 구직수당을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 후보는 주 120시간 노동 말고 기억에 남는 청년 공약 하나 없다.

 

적대 의식을 부추겨 존재감과 쾌락을 고취하는 위약(플라세보) 효과가 길게 가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가짜약은 가짜임이 인식되는 순간 약효가 곧바로 소멸한다.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1157.html

 

[아침햇발] ‘이대남’의 약발도 소멸한다 / 안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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