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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꽂힌 타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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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자리 ※ 이택광의 에서 퍼왔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이 모여서 '인간'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다는 지인이 들려준 얘기다. 순진한 인문학 전공자였던 이 지인은 그 자리에 다녀온 뒤에 과연 자신이 인문학을 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그 모임은 최재천 선생이 주재하는 자리였다는데, 이 정도면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자연과학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걸 짐작할 수가 있겠다. 이른바 '전문가들'은 생물학적 인간을 말 그대로 과학적 지식을 들이대며 조목조목 해부했을 테다. 이 지인은 충격을 받았다. 그냥 모든 인간의 행위가 뇌내 화학물질과 유전자의 영향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인문학은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좀 어이 없었지만(아무리 지인이지만 인문학자라는..
어느 가난한 여배우의 슬픔 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 733호에서 퍼옴 소녀는 예뻤다. 마을 남자아이들이 그렇게 속삭였고 거울도 확인시켜주었다. 자신이 철저히 낯선 사람 앞에서만 수줍음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혈혈단신으로 런던행 열차 삼등칸에 오르던 날, 봄바람이 약속했다. 오늘이 너의 남은 생을 통틀어 가장 초라하고 추운 하루일 거야.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열정을 알아봐줄 틈을 좀처럼 내지 못했다. 극작가가 점심을 먹는 두 시간 동안 찌는 듯한 오디션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보면 화장은 녹아내리고 마음은 무너졌다. 한때 스캔들을 염려하는 배우의 삶을 그렸으나, 이제 그녀는 가끔 윤기있는 한끼 식사를 위한 애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양과 희망의 결핍으로 갈라진 머릿결과 말라..
라캉주의 정치학의 가능성 이택광 교수의 ‘월플라워’에서 퍼옴 최근 출간한 [라캉주의 좌파: 정신분석이론과 정치학](The Lacanian Left: Psychoanalysis Theory and Politics)에서 야니스 스태브래캐키스(Yannis Stavrakakis)는 헤겔주의 좌파와 프로이트주의 좌파를 거쳐 이제 라캉주의 좌파에 대한 요청을 언급하고 있다. 라캉주의 좌파는 헤겔주의 좌파나 프로이트주의 좌파와 유사한 지점들을 공유하지만, 이들의 문제점을 라캉주의를 통해 보완 또는 극복해야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좌파들과 다른 급진주의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급진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집단의 차원을 도출해내는 통로”이고, “정치화의 과정”이며, “권력에 협력하지 않는 급진적 민주주의”이다. 그러..
“○○일보 ○사장”, 풍자가 된 모자이크 / 정정훈 변호사 ※ 4월16일치 여론면 ‘야!한국사회’에 정정훈 변호사가 쓴 글입니다. 정 변호사는 제가 쓴 글을 한 단락 인용하였는데, 인용한 글 원문(▷ 조선일보판 '벌거벗은 임금님', 장자연 리스트)에는 저와 정 변호사가 얘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주본 거울 사이에 들어와 있는 느낌입니다. “○○일보 ○사장”, ‘중요 부분’은 다 가렸다. 그러나 가려진 그 ‘중요 부위’를 대부분 보았고, 알고 있다. 정작 ○○일보는 이 빈칸을 채우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보내며, 스스로 그 빈칸의 주어가 된다. 기괴하다. 뿌옇게 모자이크 처리된 사건에서 음모론이 스멀거린다. 주어가 된 는 장자연씨의 리스트 작성에 배후가 존재하고, 사주받은 행위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나는 고민이 깊었다. ..
지율스님 플래시 작은새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필경 작은새가 하고 있는 일과 같은 일일지라도.....
죽음은 삶의 또다른 이름 김영민/철학자 상가(喪家)의 왁자지껄하고 어질더분한 현장을 슬금하게 지켜나가던 둘째 며느리 금단(방은진)이 말한다. “그기(그것이) 다 사람 사는 거 아니겠십니꺼?” 우리의 기억에서 우련하게 잊혀졌지만 이 땅의 영화학도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박철수의 급조된(10여 일 만에 제작되었다) 수작
배트맨은 법치를 선택한 것일까? 요즘 외부 필자 가운데 가장 글이 좋은 분이 정정훈 변호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면식이 없지만, 한국사회의 변호사 가운데 인문학적 지식과 인지가 가장 높은 글을 쓰는 분인 것 같습니다. 신문에 나온 사진으로만 보면 용모는 ‘오빠’로부터 꽤 거리가 멀지만,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설 때라야 가능한 개체 안의 ‘젊음’과 ‘성숙’의 공존과 융합이, 그의 글 안에는 조화롭게 구현되고 있습니다. 한겨레 원고료가 형편없지만, 부디 오래도록 지면을 빚내주시길…. 정정훈 / 변호사 영화 를 고질적인 직업정신(?)으로 가볍게 비틀어 보면, 영화는 법과 정의, 질서와 폭력에 대한 혼란스러운 은유로 가득하다. 영화는 법과 질서가 무너진 ‘고담’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세 주인공인 배트맨, 조커, 하비 덴트의 선택을 대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