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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꽂힌 타인의 글

“○○일보 ○사장”, 풍자가 된 모자이크 / 정정훈 변호사

※ <한겨레> 4월16일치 여론면 ‘야!한국사회’에 정정훈 변호사가 쓴 글입니다. 정 변호사는 제가 쓴 글을 한 단락 인용하였는데, 인용한 글 원문(▷ 조선일보판 '벌거벗은 임금님', 장자연 리스트)에는 저와 정 변호사가 얘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주본 거울 사이에 들어와 있는 느낌입니다. 
 
 

정정훈 변호사

“○○일보 ○사장”, ‘중요 부분’은 다 가렸다. 그러나 가려진 그 ‘중요 부위’를 대부분 보았고, 알고 있다. 정작 ○○일보는 이 빈칸을 채우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보내며, 스스로 그 빈칸의 주어가 된다. 기괴하다. 뿌옇게 모자이크 처리된 사건에서 음모론이 스멀거린다. 주어가 된 <조선일보>는 장자연씨의 리스트 작성에 배후가 존재하고, 사주받은 행위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나는 고민이 깊었다. 강○○ 보도 때는 ‘잘난 체한다’고 욕을 먹었는데 이번엔 ‘비겁하다’고 욕을 먹고 있다. 조선일보사의 발 빠른 ‘반응’이 없었다면 자괴감마저 들 뻔했다. (중략) 실명과 익명이 진실 추구의 결정적인 변수는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있는 사실을 비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면 그 보도는 한 걸음 한 걸음 진실에 다가가게 돼 있고, 드러날 이름은 누가 억지로 들추지 않더라도 제 진실에 겨워 어떤 식으로든 마침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의 글이다.

요 며칠 사이, “○○일보 ○사장”이나 “유력 언론사 대표”라는 표현에 대해 입장을 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입장을 기사로 표현하고 객관화해야 하는 언론의 고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우리들의 분노와 인권 보장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분노하고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이 사회적으로 올바른 해답이라고 믿는다. 반면 인권은 복잡한 관계의 겹을 벗겨내서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노력이며, 그 불편한 노력이 우리 사회의 소통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보 ○사장”이라는 각론은 그 원칙에 비추어 여전히 해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연쇄살인범 강○○과는 정반대의 권력관계에 ○○일보 ○사장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이 상업적 언론권력의 희생자였다면, ○○일보 ○사장은 언론권력의 정점이라는 지위를 이용한 가해자였는지가 문제되는 상황이다. 더욱이 실명을 공개한 쪽과 고소한 쪽 모두 신속하고 강력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수사를 통해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정되기는 어려운 성질의 사건이기 쉽다. 사건에 실체가 있다면, 그 핵심에는 더 짙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권력은 말이 필요 없으며, 그 앞에는 말이 설 자리가 없다.

결론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 있다. 사주와 법인을 동일시하는 조선일보가 자기변호의 방법으로 명예훼손죄에 의지하고, 음모의 가능성과 익명보도의 원칙을 제기하는 그 순간, 상황은 간명하게 정리되었다. ○○일보를 가릴 마법의 투명 망토 같은 것은 없었다. “○○일보 ○사장”이라는 표현에는 더이상 어떠한 모호함도, 고뇌와 비겁의 그림자도 없다. 이제 그 표현은 ‘미네르바’를 실명으로 호명하고, 강○○의 사진을 앞장서서 공개하던 조선일보의 자기기만이 가장 극적으로 노출되는 풍자의 지평을 확보하게 되었다. 원칙을 지키려는 입장과 원칙 없는 이중성이 상징적으로 만나는 사건을 “○○일보 ○사장”이라는 표현은 입증한다.

“○○일보 ○사장”이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실명을 밝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웅변하고 있다. 진실을 더 풍부하게 하는 모자이크 덕분에, 말의 권력과 명예훼손죄가 비틀어버린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더 예리하게 드러난 것이다. 조선일보의 원칙 없는 이중성은 “○○일보 ○사장”이라는 비틀어진 표현에 오래도록 갇혀 있게 될 것이다. <입속의 검은 잎>에서 기형도가 형상화한 ‘죽어 있는 혀’와 같이,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