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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꽂힌 타인의 글

죽음은 삶의 또다른 이름

김영민/철학자


 상가(喪家)의 왁자지껄하고 어질더분한 현장을 슬금하게 지켜나가던 둘째 며느리 금단(방은진)이 말한다. “그기(그것이) 다 사람 사는 거 아니겠십니꺼?” 우리의 기억에서 우련하게 잊혀졌지만 이 땅의 영화학도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박철수의 급조된(10여 일 만에 제작되었다) 수작 <학생부군신위)(1996)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서의 상가의 내면을 면밀하고 풍성하게 되살려낸다. 외계인에게 지구인의 특징을 물어본다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는 존재’라고 답할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나, 동료의 죽음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제 나름의 절차를 밟아 애도하려는 행위 속에서 현생 인류의 출현을 살피는 고인류학자의 보고는 사람의 죽음을 겪어내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사람 사는 일’이라는 상념에 이르게 한다.

 물론 그것은 역설이다. 죽은 일, 혹은 가족이나 자기의 죽음을 겪어내는 일이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 사는 일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사의 대표적인 역설이다. 그러나 사세(事勢)의 역설 속에서 인생의 묘득(妙得)을 깨단하는 일은 오히려 범상한 노릇이기도 하다. 흔히 위기 속에서 본심을 엿본다든지, 한계에 이르고서야 그 조건을 알게 된다든지,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러서야 삶이 확연해진다든지 하는 얘기들은 그리 멀리 동떨어진 고담(高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부군신위>가 묘사한 ‘사람 사는 일’은 일상성과 그 복잡성으로 모아지는데, 이는 상갓집에서 이어지는 상장례의 절차를 좇아 생동감 있게 전해진다. 이 ‘생동감’이라는 말은 부러 흘리지 않은 것이, (역시 역설적으로) 경남 합천군 가회면의 어느 시골 노인 박씨(최성)의 죽음 탓/덕에 한산하던 그 시골집과 인근은 한순간에 분잡스럽고 활기찬 잔칫집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포스터에 내세운 카피 문구-“내 죽으니 그리 좋나!”-는 이런 사정과 이어지는 풍경을 망자의 입을 통해 일거에 낚아챈다. 그러므로 문제는, 상장례는 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지를 묻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죽어 제 몸의 모든 구멍이 틀어막힌 채로 누워 있는 시신의 지위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큰아들 찬우(박철수)는 영화감독인데 제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직업의식과 그 버릇은 여전하다. (손탁의 말처럼) ‘우리’라는 말을 쓰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니체의 말처럼) 타인의 슬픔은 공들여 배워야 하는 것이지만 내남없이 관습에 얹혀 슬픔을 사회화할 뿐이다. 그래서 찬우는 아버지의 시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 죽음의 잔치를 한 편의 영화처럼 인식하고 배치한다.

 애살많아 보이는 작은고모(홍윤정)는 보험 세일즈우먼인데 오빠의 죽음을 정나미가 듣게 애도하는 틈틈이 친척들과 지기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보험 행상에 여념이 없다. 박 노인의 배다른 동생인 팔봉(김일우)은 졸부가 된 채 딸 같은 아내와 손녀 같은 딸을 데리고 찾아와선 때늦은 체신을 세우느라 실없는 유세를 떤다. 격조한 동안 크리스천이 되어 미국에서 귀국한 막내 찬세(박재황)는 제 맘대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등 전통 상례에 딴죽을 걸다가 호상차지(권성덕)의 꾸중을 듣는다. 아니나 다를까, 급기야 ‘미국’에서 온 ‘기독교인’인 찬세는 선산을 팔아치우자는 제안까지 내뱉다가 형에게서 면박을 당한다. 40년 전에 머슴 노릇을 하다가 ‘도라꾸’(트럭)를 훔쳐 달아난 태식(박동현)은 현금으로 빽빽한 가방 2개를 들고 와서는 영전에 통곡하며 사죄를 빈다. 읍내 다방의 마담과 아가씨들은 망자인 박씨와의 인연을 기념하며 한바탕의 주연(酒宴)과 노래로 배설하고, 당대의 신호로서 졸연히 다가든 민방위훈련조차 ‘치외법권’인 상갓집을 비껴가지만, 저녁 8시 텔레비전의 안방 드라마는 마당을 가득 채웠던 아주머니들을 모짝 안방으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자잘하고 지질한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삶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Beyond life nothing goes!)는 취지의 격언으로 ‘삶의 철학’을 싸잡았던 어느 서양 철학자의 주장이 이 동아시아의 어느 상갓집 풍경에서만큼 더 온전하게 들어맞기도 어려울 듯하다. 서양의 장례가 검은색 정장의 한결같은 조문객들이 만들어내는 그 침묵의 공간으로 특징을 삼는다면, 우리의 것은 마치 죽어 누워 있는 망자를 일으켜 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쉼없이 훤화(喧譁)하는 풍경 속에서 그 알짬이 있다. 호상의 말처럼 “상갓집에서 떠들고 노는 기 괜찮은 기라!” 상가를 찾은 조문객들은 제 입장과 관계를 좇아 문상의 표현을 나누고 애도의 흉내를 짓지만, 그들은 그 중에도 자신들의 삶을 알뜰하고 이기적으로 챙길 뿐이고 제상 뒤에 누워 있는 망자의 시신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법이다.

 실로, 죽음의 장소 속에서 삶은 가장 약동하는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네 상장례가 과연 그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새삼 물을 필요조차 없다. 종교의 그 질긴 생명력이 망자들에 대한 ‘애도’(엘리아스 카네티)에 있는지, 아니면 산자들의 삶을 분배정의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독일의 종교사회학자들)하는 데 있는지 하는 문제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공자의 말씀대로 일단 귀신이 되었으면 가까이해선 안 되는 일(敬而遠之)이며, 살아 있는 자들이 주관하는 상장례란 그저 보내는 일이 아니라 보내 ‘버리는’ 일인 것이다. 그 사이, 살아 있는 이들은 제 욕심과 고민 속에서 물덤벙술덤벙하며 죽은 자의 과거를 다시 반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