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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꽂힌 타인의 글

배트맨은 법치를 선택한 것일까?

요즘 <한겨레> 외부 필자 가운데 가장 글이 좋은 분이 정정훈 변호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면식이 없지만, 한국사회의 변호사 가운데 인문학적 지식과 인지가 가장 높은 글을 쓰는 분인 것 같습니다.
신문에 나온 사진으로만 보면 용모는 ‘오빠’로부터 꽤 거리가 멀지만,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설 때라야 가능한 개체 안의 ‘젊음’과 ‘성숙’의 공존과 융합이, 그의 글 안에는 조화롭게 구현되고 있습니다.
한겨레 원고료가 형편없지만, 부디 오래도록 지면을 빚내주시길….
   


정정훈 / 변호사

영화 <다크 나이트>를 고질적인 직업정신(?)으로 가볍게 비틀어 보면, 영화는 법과 정의, 질서와 폭력에 대한 혼란스러운 은유로 가득하다. 영화는 법과 질서가 무너진 ‘고담’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세 주인공인 배트맨, 조커, 하비 덴트의 선택을 대립시킨다.

배트맨의 활약은 고담시의 범죄와 악에 대해서는 무기력하다. 영웅을 흉내내는 가짜들이 난무할 뿐이다. 배트맨은 영화 초반부터법과 제도의 바깥에서 사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자신의 방식에 대해서 회의한다. 법과 정의 사이의 괴리라는 고전적인 법철학적질문과 극단적인 선과 악의 존재론적인 동일성이라는 묵직한 주제가 겹쳐진다.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힘을 가진 존재이고, 법과 불법, 정의와 폭력 사이에서 분열된 방식으로 그 힘을 행사한다. 배트맨은 합법(낮)과 불법(밤)의 경계를 오가며 변신을 반복하고, 검사 하비 덴트는법과 정의의 수호자에서 불법과 폭력의 괴물 ‘투 페이스 하비’로 추락한다. 절대악 조커는 법과 질서의 현실로부터 정신병적으로 분열된 채 불법(또는 무법)의 영역에 초월적으로 존재한다. 그들의 분열은 박쥐 가면, 엉성한 조커 화장, 두 개의 얼굴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세 명의 ‘어둠의 기사’(다크 나이트)는 서로가 서로를 완성한다. 배트맨의 존재는 대립물인 절대악 조커를 불러내고, 조커는 다시 하비 덴트를 ‘투 페이스 하비’로 만들어낸다. ‘투 페이스 하비’의 두 얼굴에는 배트맨과 조커, 정의와 폭력, 법과 권력의 이중성이 겹쳐진다. ‘고담’이라는 불법과 무질서의 공간이 근원적으로 교정되지 않는 한, 서로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분열과 악순환을 해결하는 영화의 결말은 다소 상투적이다. 배트맨의 선택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하비 덴트를 다시 영웅화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라는 방식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진실을 묻어버리고, 다른 영웅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

배트맨은 고뇌 끝에 이중성의 가면을 버리고 ‘법치’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영웅에 의한 법치’는 없다. 법치는 법에 의해 권력을 통제하는 시민들의 정신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법치를 이야기하자면, 하비 덴트가 ‘투 페이스 하비’가 될 수 없도록 하는 것, 권력의 속성에 내재하는 악의 경향성을 통제하는 것이다. 권력이 악과 싸운다는 명목으로 악으로 전화하지 않도록 권력을 통제하는 것, 그것이 법치다.

그런 관점에서, 괴물로 변한 권력을 은폐한 배트맨의 선택은 오히려 법치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괴물로 변한 권력을 기억해야 한다. 권력과 괴물의 두 얼굴이 하나의 뿌리일 수 있음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정치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불행한 결말을 기억하는 시민들에 의해서 정의와 평화가 회복될 것인지는 열려진 결말이다. 배트맨은 진실을 조작하고 기억의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시 영웅으로의 귀환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속편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법은 종종 ‘가면 쓴 권력’이라는 조롱을 받아왔다. 배트맨은 가면을 벗어도, 권력은 언제든지 법이라는 보편성의 가면을 쓰고 행사될 수 있다. 권력이 주장하는 법치는 ‘가면 쓴 법치’일 뿐이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권력의 ‘법치’는 보편성의 가면마저도 불필요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노골적인 이중성. ‘투 페이스 하비’가 상징하는 법과 권력의 이중성을 닮았다.
 

<한겨레> 2008년 8월28일 여론면(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