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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꽂힌 타인의 글

라캉주의 정치학의 가능성

이택광 교수의 ‘월플라워’에서 퍼옴


최근 출간한 [라캉주의 좌파: 정신분석이론과 정치학](The Lacanian Left: Psychoanalysis Theory and Politics)에서 야니스 스태브래캐키스(Yannis Stavrakakis)는 헤겔주의 좌파와 프로이트주의 좌파를 거쳐 이제 라캉주의 좌파에 대한 요청을 언급하고 있다. 라캉주의 좌파는 헤겔주의 좌파나 프로이트주의 좌파와 유사한 지점들을 공유하지만, 이들의 문제점을 라캉주의를 통해 보완 또는 극복해야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좌파들과 다른 급진주의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급진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집단의 차원을 도출해내는 통로”이고, “정치화의 과정”이며, “권력에 협력하지 않는 급진적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세 가지 계기들이 반드시 라캉주의 좌파만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헤겔주의와 프로이트주의에서 유사한 정치적 계기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면 이들과 다른 차원에서 어떻게 라캉주의의 정치학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 발표는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한 시도이다.

라캉주의 좌파의 가능성은 헤겔주의보다도 프로이트주의와 라캉주의가 결별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라캉주의의 정치적 경계가 발생하는 지점은 “탈정치적인 프로이트주의의 보수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순간이다. 물론 이런 라캉주의는 “투박한 프로이트주의적 급진주의”와 다른 차원의 정치학을 전제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주의 좌파로 대표적인 이들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그리고 게자 로하임(Geza Roheim)이다. 프로이트주의 좌파의 주장은 “성적 급진주의”(sexual radicalism)로 요약할 수 있다.

성적 급진주의의 핵심은 섹슈얼리티의 중요성을 재정위하고, 성해방을 권장하기 위해 프로이트주의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성적 보수주의에 대항해서 성해방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주류 질서의 전복을 도모했지만, 이런 프로이트주의 좌파의 문제점은 성해방과 사회혁명을 동일시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라캉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해방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섹스는 있지만 성적인 ‘관계’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프로이트주의 좌파가 기획하는 성적인 조화나 성을 통한 해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성해방이라는 것은 완전한 인간의 완성이라는 헤겔주의 좌파의 구상처럼 ‘유토피아적 미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헤겔주의나 프로이트주의 어디에서도 다룰 수 없는 어떤 정치적 기획을 라캉주의는 제시할 수 있을까? 라캉주의 좌파의 정치는 향유의 위상학에서 현실성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주의와 헤겔주의를 결합하고자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체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생산했다. 처음에 폭압적으로 복종을 강요받던 주체가 나중에 자발적으로 복속을 자청하는 경우를 마르쿠제는 지적하고 있다. 이른바 협력과 동화의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사회는 복속을 재생산해낸다. 마르쿠제는 프로이트를 원용해서, 상품을 리비도적 대상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확보한다. 그러나 마르쿠제의 프로이트주의와 라캉주의를 구분하는 결정적 차이는 리비도에 대한 정의에 있다. 마르쿠제의 기획은 라캉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를 통해 ‘메타심리학’(metapsychology)을 정초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철저하게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biologism)에 근거해서 정치적 기획을 전개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이런 전제로 인해 마르쿠제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전파자”를 대립시키면서 전자의 힘을 통해 억압의 폐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런 경향은 라이히에 대한 고찰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성격분석](Character Analysis)에서 라이히는 금지되지 않은 ‘생식기 성격 구조’를 본질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총체적 유기체들 사이에서 가능한 성적 화합을 주장했다. 마르쿠제와 마찬가지로 라이히는 충동의 양면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고통으로부터 쾌락을 분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라이히는 삶의 에너지를 가로막고 신경증과 성적 폐쇄를 유도하는 사회적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서 라이히가 설정하는 제도와 욕망의 대립은 이론적인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라캉은 라이히의 경우와 달리,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수용했지만, 결코 억압을 생산하는 것이 사회적 압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압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원초적 억압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나 사회는 억압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를 통해 구조화하는 무의식의 존재이다. 억압과 초자아는 문명의 불만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향유의 결여를 ‘나쁜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 라캉주의적 정치기획은 리비도와 억압에 대한 관점에서 명쾌하게 프로이트주의의 그것과 구분할 수 있다. 헤겔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주의도 실패한 정치기획이었던 셈이다. 라캉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기획일 수밖에 없다. 이런 라캉주의의 기획은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겔주의나 프로이트주의처럼, 라캉주의의 정치기획도 개인을 통해 집단을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바로 주체에 대한 해명과 명명을 통해 사회적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라캉의 이론은 민주주의를 급진화하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소비주의는 민주주의 제도를 장악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급진성을 무화시키고 있는데, 이런 흐름에 대항해서 라캉주의는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을 보여준다. ‘자발적 복종’의 극복이라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급진화에서 중요한 사안인데, 무의식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정동(affect)과 향유는 끊임없는 권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묻기’에서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도출할 수가 있다. 이런 기획은 라캉이 언급한 ‘다른 주이상스’ -- 부정성과 향유를 연결시키는 다른 유형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출현한다. 이것은 판타지의 정치학 너머에 있는 에토스를 만들어낸다.

이런 관계는 “부정성과 함께, 그리고 향유와 함께 있는 관계”가 아니고, “부정성과 향유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이를 통해 라캉주의적 정치기획이 제시해야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을 향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윤리학”이다. 윤리학으로 변주되는 주이상스의 문제야말로 라캉주의 정치기획에서 핵심을 이룬다. 리비도의 투여와 주이상스의 동원이 모든 정치의 일반원리라는 사실을 라캉주의는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라캉주의 정치학의 지향점은 권력과 권력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향유의 변증법을 재정향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이고, 이런 개입의 시도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정체성을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독특하게’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