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 꽂힌 타인의 글

인문학의 자리

※ 이택광의 <월플라워>에서 퍼왔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이 모여서 '인간'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다는 지인이 들려준 얘기다. 순진한 인문학 전공자였던 이 지인은 그 자리에 다녀온 뒤에 과연 자신이 인문학을 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그 모임은 최재천 선생이 주재하는 자리였다는데, 이 정도면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자연과학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걸 짐작할 수가 있겠다. 이른바 '전문가들'은 생물학적 인간을 말 그대로 과학적 지식을 들이대며 조목조목 해부했을 테다. 이 지인은 충격을 받았다. 그냥 모든 인간의 행위가 뇌내 화학물질과 유전자의 영향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인문학은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좀 어이 없었지만(아무리 지인이지만 인문학자라는 사람이 이 정도 수준의 사유밖에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웃으면서 반문했다.

"그 좌담회 끝난 뒤에 한번 물어보시죠. 그 분들 자녀교육은 어떻게 시키시는지. 조기유학을 보내셨는지, 아니면 특별과외나 학원을 보내시는지, 그 자리에서 물어봤으면 어떤 답이 나왔을까요? "

인간의 행동이 유전자의 문제이고 인간의 몸이라고 불리는 것도 화학적 결합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이미 고대 때부터 인간의 상상력에 박혀 있던 것이다. 이걸 무슨 대단한 '발견'인양 설레발 치는 건 과학적 태도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아무리 탁상 위에서 인간을 해부해도, 결국 '현실'로 돌아오면 그 '과학자들'은 상징계의 주체들이다. 자녀들을 서울대에 보내고 싶어하고, 하버드나 MIT에 간 기특한 자기 아이들 자랑하기에 바쁘다. 섹시한 여성이 지나가면 유혹을 느끼고, 실험을 망치거나 논문이 난관에 부딪히면 괴로워하면서 폭음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유전자의 선택'이거나 '화학물질의 반응'에 불과하다고 거듭 '과학적'으로 강변해도 마음의 상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이 엄연한 '진리'를 모르쇠하고 오직 '과학적 데이터'만을 주장하는 건 실재의 간섭을 회피하기 위한 판타지의 발명에 불과하다. 어떻게 말하면 이런 발화를 서슴없이 하는 '과학자'야말로 근대가 만들어낸 문제적 증상인 것이다.

과학은 과학이고 윤리는 윤리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적 앎이 윤리를 대체할 수 없다. 이건 이미 19세기에 나온 결론이다. 20세기는 이 결론을 확인하는 시대에 불과했다. 우리에게 라캉주의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라캉에게 중요한 건 과학이 아니라 '과학자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출현한 이 '무신론적 주체'야말로 라캉주의의 탐구대상이었고, 이 주체야말로 근대의 문제를 해결할 지점이라는 게 라캉주의 정치기획의 전제이다. 라캉주의적 언술에서 '과학적 주체들'이 반발심을 느끼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주의도 아니고, 유독 라캉주의에 국한해서 집중적으로 저항하는 이런 심리적 기제들은 확실히 라캉주의에 과학적 주체들을 도발하는 몇 가지 측면들이 내장되어 있다는 걸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