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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첨삭’ 알바 뛰는 검사님 [미디어스 데스크] 2009 대한민국 ‘감시와 처벌’ 안영춘 편집장 jona01@mediaus.co.kr 1-1.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은 공간 기획을 넘어선 심리 기획이다. 감옥 둘레를 따라 둥근 원통 모양의 건물을 세운다.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감방이 층층이 배치된다. 감옥 한가운데에도 원통 모양의 감시탑이 세워진다. 간수 한 사람이 사방을 둘러보며 죄수 전원을 감시할 수 있으니 대단히 효율적이다. 하지만 진짜 효율은 ‘간수 숫자 대 죄수 숫자’ 비율로 산출되지 않는다. 죄수들은 간수가 감시탑에 있는지 없는지, 감시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간수가 없어도, 혹은 그 안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어도 상관없다. 죄수들은 ‘자기검열’로 스스로를 통제한..
‘PD수첩’ 기소와 오럴섹스 금지의 공통점 막걸리 보안법 시대로 퇴행하는 대한민국 검찰 검찰의 제작진 기소와 관련한 기사들을 읽다가 오래 잊었던 약속처럼 퍼뜩 떠오르는 소설 한 편이 있었다. 대학생 때 읽었던가. 최일남의 단편 이었다. 소설에는 단 한 군데에도 ‘암울한 시대상’ 따위의 직설적인 언급은 없었다. 맘만 먹으면 책 쥔 손 한 번 내려놓지 않고도 독파할 수 있을 만한 분량의 글은 내내 무표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읽는 이의 가슴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잿빛으로 ‘젖어’들었다. 소설은 ‘일상이 감옥이면 고통이라고 해서 무덤덤해지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나직이 묻고 있는 듯했다. 무대는 서울 무교동의 한 낙지볶음집. 근처 신문사에 다니는 기자들이 무력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석탄 같은 가슴으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한숨 섞인 대화를 나누는 ..
검찰 “언소주 관련 ‘수사 촉구성 보도’ 말라” ‘형사 처벌’ 기정사실화하는 언론에 이례적 요구 “검찰이 조선·동아·중앙일보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에 대해 광고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좌파성향 단체 관계자들에게 공갈 및 강요죄로 형사처벌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부장 노승권)는 16일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언소주) 등 단체들의 광고주 협박 행위에 대해 법률 분석을 한 결과, 공갈 및 강요죄에 해당하는 불법 행위로 결론 내렸다.” “언소주와 관련해서 마치 처벌을 기정사실화하고 수사하는 것 같은 ‘추측/수사 촉구성 보도’에 난처하다. 당분간 개별 기자와 접촉하지 않겠으니 양해 바란다. 나중에 공개할 필요가 있으면 공개하겠다. 모든 건 3차장에게 확인해달라.” “(죄목, 집행부 소환 일정 등에 대해)..
2009, 탄핵의 추억 [미디어스 데스크] 검찰·정권의 모호성·소음 전략의 손익계산 미디어스 안영춘 편집장 jona01@mediaus.co.kr 지난 2004년 봄,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의 후폭풍은 수 계산에만 능한 프로 정치꾼들의 한심한 인식능력을 폭로했다. 주권자인 국민이 탄핵소추를 그저 ‘게임’으로 볼 거라는 전제를 깔고 일을 저질렀는데, 주권자들은 그걸 자신들에 대한 ‘겁박’으로 읽었다. 자신들이 직접 뽑아 1년 남짓 지난 대통령을 임기가 두어 달밖에 남지 않은 묵은 대의제 권력이 억지 논리를 들어 축출하려 했으니, 주인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역으로, 레임덕에 들어선 대통령이 새로 구성된 국회를 해산하려 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주인의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건 시간밖..
‘박연차 게이트’ 수사결과 발표의 뒷풍경 이례적 규모 축소와 보도 제한…노 전 대통령 죽음 원인 흐리기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 발표는 사건의 종지부 찍기가 아니라 화룡점정이다. 발표 내용이 피의사실 공표죄와 국민 알권리 사이에서 어떻게 경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형식상 아무리 피의사실로서의 자격밖에 없더라도 대법원 판결과 다름없는 가치로 올라서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정한다. 설령 피의사실이 재판에서 뒤집어지더라도 이데올로기적 단죄가 제자리로 복원되지는 않는다. 수사기관이든 언론이든 또다른 사건에 매달려 같은 행태를 되풀이할 뿐이다. 정정훈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법원 판결에는 칼 맞은 이후 갑옷을 내주는 때늦음이 있다”고 표현했다. (‘칼’의 팩트를 견제하는 ‘펜’의 팩트를!) 대검찰청이 오늘(12일) 오후 3시 ‘박연차..
지율스님이 ‘정정보도’에 빠진 이유 [미디어스 데스크] ‘수의 악령’을 깨기 위한 또다른 결가부좌 안영춘 편집장 jona01@mediaus.co.kr 신문에서 가장 압축적인 표현양식은 뭘까? 스트레이트 기사나 사설은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압축적 표현의 결정체다.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는 신문이라는 매체의 발달사와 궤를 같이한다. ‘사실’(만)을 가장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좀 더 정확하게는 독자와 사회가 그렇게 믿도록 신화화한 ‘특화된’ 형식이자, 신문 기사의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만평 또한 매우 압축적이다. 손바닥보다 좁은 지면 위에 당일의 핵심의제를 ‘촌철살인’한다. 다만 스트레이트 기사가 다분히 공학적 결과물이라면 만평은 작가의 직관과 창의력에 따라 결과가 판이해지는 창작물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나 ..
‘노무현’ 그 이름에 동의하지 않았던 자들의 슬픔 [미디어스 데스크] 그의 생전에 그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몇 사람이 어울려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의 영결식이 치러지고 난 늦은 밤이었다. 노래는 내남없이 구슬펐다. 낮에 TV 생중계를 보거나 서울광장에 서서 한소끔 눈물을 몰래 훔친 것이, 일주일 내내 머리가 멍하게 아팠던 것이, 그 순간만큼은 쑥스럽거나, 이물스럽지 않았다. 그의 이념과 정책에 동의하지 않은 것과 그의 죽음에 연민하는 것은 모순돼 보이지 않았다.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나는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불렀다. 노래를 마칠 무렵, 그의 죽음과 관련해 글을 몇 편 쓰고도 정작 그이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안구 건조증이라도 걸린 게..
노무현을 기억하려는 자와 지우려는 자 [미디어스 데스크] 자살과 애도의 정치·사회학적 잡설 안영춘 편집장 jona01@mediaus.co.kr 고전주의 미학이라면 이럴 땐 비극적이되 장엄하고 숭고한 이미지라야 한다. 지금 한국의 대중매체들이 재현해내는 애도의 퍼포먼스가 꼭 그렇다. 톡톡 튀는 목소리로 오락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여성 아나운서는 라디오 뉴스에서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신문 호외 편집도 더없이 무겁고 장중했다.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상태도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숙취로 절여진 내 전두엽을 치고 간 건 드라마 소품처럼 사소한 기억이었다. 경악하고 애달파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부조리해보였다. 내가 기억해낸 건 비교적 최근 누군가로부터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