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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총체성에 묻는다. 그대는 다운시프터인가? - MBC 심야 스페셜 를 보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초등학생 때 ‘우리나라의 70%는 산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배운다. 내가 그 지식을 머릿속에 새길 무렵, 대한민국의 대표 유행가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로 시작하는 남진의 ‘임과 함께’였다. 산악 지형의 국가에서 태어나 저 푸른 초원을 동경하며, 나는 공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나를 비롯해 이 나라 사람들이 느낀 공복감은 초원을 향한 동경이 아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의 옛 버전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둘은, 그 뿌리가 ‘번듯한 내집’이라는 데서 하나다. 나 또한 초원보다는 그저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작은 공부방 하나를 갈망하며 단칸방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많은 이들이 도시생활에 넌더리를 낸..
사랑하라, 바로 지금 -MBC 베스트극장 ‘새는’을 보고 사랑했던 이의 부음을 접하는 상진의 모습은 뜻밖에 담담하다. 지금, 사랑의 열병을 한창 앓고 있는 그대는 먼 훗날 상진의 처지가 되었을 때 그처럼 홀연히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할 것이다. 미소까지 살며시 머금은 그를 보며, ‘상진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었을까’ 의문을 품어봄 직도 하겠다. 하지만, 그런 의문 따위는 집어치워라. 사랑의 모습은 어느 것 하나 정형화되지 않느니, 그대가 경험한 사랑은 다른 사랑에 대해 어떤 판단의 잣대도 되어주지 못한다. 사랑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상진의 사랑은 외사랑이었다. 외사랑의 주체이자, 외사랑의 대상. 그의 사랑에는 세 사람이 관계되어 있지만, 흔한 신파의 삼각관계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오시오 아파트’를 꿈꾸다! - MBC 베스트극장 ‘오시오 떡볶이’를 보고 어느 대기업 아파트 광고의 메인 카피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파트’이다. 여기서 가족은 ‘정상 가족’에 한정된다. 아파트가 1인 가족의 생활양식을 대변하는 주거 형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파트 광고의 컨셉으로 ‘가족주의’가 동원되는 것은 확실히 한국적이다. ‘아파트 가족주의’는 어쩌면 가족주의가 가족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국적 현실과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관계 위에서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는 정작 얼마나 많은 남편과 아버지를 가족들로부터 빼앗는 결과를 낳았던가. 가족주의가 가족 구성원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모로 명백하다. 우리는 헌법상 주권자로서 많은 기본권을 가족주의 국가체제 아래서 유린당해 ..
파시즘의 망령이 배회한다 [안영춘의 미디어너머] OBS 경인TV 기자 2007년 12월 17일 (월) 07:11:00 히틀러의 콧수염, 나치 문양, 스킨헤드족…. 파시즘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들이다. 하나같이 민주주의의 억압과 파괴를 환유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파시즘이 정작 민주주의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등장하는 맥락까지 잡아내지는 못한다. 히틀러는 박정희, 전두환과 과(科)가 다르다. 제3제국은 총구 끝이 아닌 국민의 투표용지 위에 세워졌다.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나는 지금 파시즘이라는 이름의 망령이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대선 결과보다는 대선 이후가 벌써 두렵고, 대선 과정은 이미 불길했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풍경’과 지금 한국의 모..
‘행복한 눈물’과 ‘욕쟁이 할머니’ 사이 [안영춘의 미디어너머] OBS 경인TV 기자 2007년 12월 03일 (월) 07:30:08 난 리히텐슈타인의 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시감(데자뷰)이 드는 건 그나마 신문이나 잡지 속 사진으로 그 그림을 몇 번 스쳐봐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 화가가 예술적 모티프로 삼았다는 ‘진짜’ 만화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렁그렁 눈물 맺힌 그림 속 여성은 어려서 봤던 만화영화 속 원더우먼을 빼닮았다. 어쨌든 그림에다 작품이름, 화가이름까지 조합할 수 있게 됐으니, 평소 미술과 담쌓고 사는 나로선 누군가에게 깊이 감사할 일이다. 작품 한 점 값이 만화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임을 안 것이 더 큰 수확이기는 하지만. 얼마 전 시작된 어느 금융그룹의 TV 광고에는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연서(戀書) ; 신학림 기자 전(前) 2007년 11월 19일 (월) 07:54:54 신학림 ‘기자’라고 대뜸 부르려니 한 번은 목에 걸립니다. 신 기자께서야 그리 여기시지 않겠지만, 나이와 경력의 위계가 아직 삼엄한 한국 언론계 풍토에서는 호칭 하나로도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할 일이 더러 생깁니다. 그런데 신 기자를 신 기자라고 부르고 나니 새삼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자를 기자라고 부르기 어려운 건 홍길동이 호부호형 할 수 없는 것보다 더 이상하지 않은가? 제가 신 기자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입니다. 굳이 ‘연서’라고 이름붙인 건 신 기자께서 제게 해맑은 마음을 ‘전염’시켰기 때문입니다. 해맑은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살면서 몇 번이나 경험해보셨습니까? 저는 연애 감정이 먼저 떠오르는군요. 그 감정은 불같이 뜨거우면서도 ..
객관주의의 ‘쌩까기’ 기술 [안영춘의 미디어너머] OBS 경인TV 기자 2007년 11월 05일 (월) 09:36:40 며칠 전 다리가 부러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당대의 건축공학과 산업디자인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댄(아직 한쪽 다리는 멀쩡한) 성인에게 적대적인, 적어도 무자비한 학문이었다. 세상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용변 보는 것조차. 세렝게티의 포식자들이 네 다리 가운데 하나만 부러져도 굶어죽는다더니, 내가 사는 이곳이 곧 정글이었다. 가끔 장애인 관련 기사를 써왔던 경험은 내게 ‘의식’으로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테제만이 더없이 적확했다. 내가 장애인이었다면 내가 쓴 기사도 달라졌을까? 얼치기 한시 장애인이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뜻없이 ..
누구를 위하여 조종(弔鐘)은 울리나 [안영춘의 미디어너머] OBS 경인TV 기자 2007년 10월 21일 (일) ‘자유’는 경합한다. 우리(특히 정치인들이나 경영자들)는 그 대상을 흔히 ‘평등’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유는 정작 자유 자신과 경합한다. 내 자유와 타자의 자유가 만나는 곳에서 자유의 경계는 그어진다.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내 자유는 타자에게 억압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폭력이 되기도 한다. 때릴 자유, 스토킹할 자유, 약탈할 자유가 형용모순인 까닭은 자유의 이런 경합적 속성에서 비롯된다. 따지고 보면 평등-불평등이라는 것도 ‘축적의 자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경합의 양태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론의 자유라고 다를 리 없다. 누구에겐 언론자유가 다른 누구에겐 언론탄압이 될 수도 있다. 해마다 ‘국경없는 기자회’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