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춘의 미디어너머] OBS 경인TV 기자
2007년 12월 03일 (월) 07:30:08
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시감(데자뷰)이 드는 건 그나마 신문이나 잡지 속 사진으로 그 그림을 몇 번 스쳐봐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 화가가 예술적 모티프로 삼았다는 ‘진짜’ 만화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렁그렁 눈물 맺힌 그림 속 여성은 어려서 봤던 만화영화 속 원더우먼을 빼닮았다. 어쨌든 그림에다 작품이름, 화가이름까지 조합할 수 있게 됐으니, 평소 미술과 담쌓고 사는 나로선 누군가에게 깊이 감사할 일이다. 작품 한 점 값이 만화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임을 안 것이 더 큰 수확이기는 하지만.
▲ 중앙일보 11월29일자 11면.
이들의 공통점은 반(反) 엄숙주의다. 팝아트가 미디어의 기법과 광고의 이미지를 미술로 불러들였다면, 그래피티는 캔버스와 화랑을 거리로 불러냈다. 양쪽 모두 근엄한 기존 미술(계)에 반기를 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불러들인 것’과 ‘불러낸 것’의 차이는 크다. 앞의 두 사람은 이미 자본주의의 어릿광대가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비자금으로 덧칠한 미술작품은 ‘돈=예술’의 등호관계를 표상한다. 반대로, 뱅크시는 자본주의를 공략하는 게릴라다. 그의 ‘낙서’에까지 돈질이 덤비고 있다고 하는데, 내 눈엔 자기 똥마저 음식으로 착각하는 비육견 류(類) 인간들의 게걸스런 퍼포먼스로밖엔 안 보인다.
주제넘게 미술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불가의 연기설에 기댈 것도 없이, 비슷한 시기에 이들이 (커밍아웃이건 아웃팅이건) 잇달아 TV에 등장한 것을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의 징후로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얘기다. 오늘날 왜 재벌총수 부인은 팝아트에 꽂히고, 왜 금융그룹은 팝아티스트를 동원하며, 여기서 뱅크시의 배역은 또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기호들의 문맥 위에 재배치해보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도 TV가 해주면 좋으련만, TV는 나열할 뿐 꿸 줄 아는 능력(一以貫之)이 없다. 달리 바보상자가 아니다.)
팝아트는 대량복제를 전제하는 예술이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양식을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원본부터가 이미 하나의 복제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은 원본 사진의 복제이면서, 아메바처럼 수없이 무성생식한 짝퉁의 계보이기도 하다. 고상한 원작 진품만 찾을 것 같은 재벌총수 부인이 여기서 찾으려는 건 짝퉁 중에서도 ‘진짜’ 짝퉁이다. 수없이 많은 짝퉁 가운데서 진짜 짝퉁을 갖는 건 몇 편의 위작을 솎아내고 원작 진품을 갖는 것보다 ‘경쟁률’ 차원에서 값어치 있는 선택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모두 너무나 자본친화적이어서 좋았을 수도 있겠다.
▲ 경향신문 2007년 3월26일자 22면.
발칙하게도 뱅크시는 이런 서사를 단숨에 우화로 바꿔 놓는다. 행차에 나선 임금은 투명 곤룡포를 걸친 채 으스대고, 뒤따르는 신하들은 자신의 조악한 심미안을 탓하며 조아리고, 잠적한 사기꾼 재봉사는 열심히 금화닢을 세고 있을 때, 행차를 지켜보던 소년 뱅크시는 외친다. “임금님은 벌거숭이잖아.” (뱅크시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를 풍자한 작품을 실제로 만들었다.) 그런데 책 속 임금은 뒤늦게 자신의 스트리킹을 깨닫지만, 책 밖의 사정은 다르게 돌아가는 것 같다. “흠! 이 옷은 내 옷이 아니니라. 배달부의 옷이니라.”
▲ 뱅크시 작품.
일부 언론은 지금의 선거 양상을 개탄하지만, 난 정작 그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그들에게 상징 싸움에 대처할 능력과 의지가 모두 없다는 게 문제다. 강남의 타워팰리스 주민과 그 옆에 붙어 있는 구룡마을 비닐하우스촌 주민을 하나로 부를 수 있는 실존적 호칭은 없다. 그런데도 언론은 선거 공간에서 양쪽을 한통속으로 ‘국민’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국민’이 결코 허명은 아니다. 누군가를 포섭하고, 다른 누군가를 배제한다.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이명박식 경제성장론에서 국민은 타워팰리스 주민이지 결코 구룡마을 주민일 수 없지만, 구룡마을 주민이 ‘국민’으로 호명될 때(조선 사람이 ‘황국신민’으로 호명될 때), 차별은 은폐되고 실존은 망각된다.
▲ 한나라당이 TV광고로 내보내고 있는 '욕쟁이 할머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