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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PD수첩은 ‘언어 전쟁’이다

제 블로그에 들어와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군요.
공과 사의 균형이 무너지고,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입니다.
무엇보다 글 쓸 시간이, 그럴 만한 마음의 평정을 찾을 겨를이 없습니다.
얼마 전 한 영화잡지에 발표했던 글을 올립니다.
제가 지은 집에 스스로 찾아올 기회가 많아지길, 그리하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기를 바라고, 벼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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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수첩은 ‘언어 전쟁’이다

15년 동안 이름 석 자 뒤에 ‘기자’라는 호칭을 달고 살면서, 난 언론인이 1인분의 용량을 넘어서는 직업인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를 포함해 적지 않은 언론인들이 자신의 능력과 인격의 용량보다 큰 ‘사역’을 감당하고 산다. 비슷한 부류의 직업인으로 종교인, 교육자 등을 꼽을 만한데, 지식노동을 한다는 것 말고도 이들에겐 타인을 호리고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유전학적으로 사기꾼에 가까운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런 비유가 자학적인 과장인 건 맞지만,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역설적으로 과시하거나 도덕적 긴장을 유지하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더는 내 직업에 그 따위 애증의 나르시시즘을 품지 않기로 했다. 사회적 의제의 설정 및 유통을 도맡아온 언론인과 언론(사)의 위상이 꾸준히 동반하락해온 것은 대개 아는 바다. ‘시민 기자’(심지어 ‘게릴라 기자’)라는 비직업적 언론인과 ‘1인 미디어’라는 비기업적 언론의 등장을 바라보는 기존 언론인과 언론의 심경은 신분해방 사태를 맞닥뜨린 귀족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내 나르시시즘의 ‘방전’은 그런 사정과 별 무관하다. 그보다는 지친 몸과 쇠잔한 넋을 학대해가면서까지 세상에 대고 발언해야 할 유인요소가 ‘실종’된 데 따른 것이다. 나는 요즘 부쩍 비감하다.

공영방송 KBS의 사장이 청와대에서 파견한 참주들(이사회)에 의해 해임되고, 검찰에 체포돼 ‘파렴치범’(특가법상 배임 혐의)으로 기소된 사태는 언론인의 눈에 낯설고 거칠기만 하다. 하지만 눈여겨봐야 할 것은 KBS 사장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그에게 덧씌워진 ‘언어’가 문제의 중핵이다. 그를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언어의 출발점은 ‘현저한 비위’(감사원 감사보고서)다. ‘부실 경영’에 대한 양쪽 주장이 극과 극을 달리는 건 차치하더라도, ‘부실하면 비위가 현저한 것’이라는 언설은 이성의 울타리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다. 해괴할 뿐 아니라 반인권적이다. 같은 논리로, 성적이 부실한 학생은 현저한 비행 청소년인가?

KBS 사장 사태가 좁게는 개인, 크게는 공영방송 독립의 문제라면 MBC <PD수첩> 사태는 저널리즘 자체의 문제다. “벌써 넉 달이 다 됐다고요?” MBC가 사과방송을 하던 지난 12일, ‘광우병 쇠고기’ 첫 편(4월29일 방영)을 제작했던 김보슬 PD는 화들짝 놀랐다. 언론을 향한 공안의 칼바람은 그에게서 시간관념을 증발시켜 버린 듯했다. 넉 달 전과 넉 달 뒤는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단층이다. 지금 ‘언어’로 남은 PD수첩 ‘광우병 쇠고기’ 편의 기억은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PD들이 인사 조처되면서 ‘석고대죄 뒤 귀양 가기’의 봉건 퍼포먼스는 완성됐다.

PD수첩에게 지난 넉 달은 ‘언어의 전쟁’이었다. (‘언어와의 전쟁’이 아니다. ‘언어와의 전쟁’은 대상이 ‘언어’이지만, ‘언어의 전쟁’에서 대상은 언어를 생산·유통하는 타자다. 여기서 언어는 전쟁을 수행하는 무기다.) 출발은 ‘광우병 괴담’이라는 딱지 붙이기였다. 한때 거리의 촛불에 밀려 멸종하는 듯했던 이 언어는 여론을 아랑곳 않는 국가권력(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검찰)의 우격다짐이 작동하면서 되살아나, PD수첩은 물론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에 대한 담론을 지배하게 됐다. 언어의 고지는 국가권력과 몇 개 신문의 손에 넘어가고, 거짓의 수사학이 진실의 언어를 대체했다.

왜 하필 언어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도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모든 언어는 정치적이다. 그러나 언어의 정치성은 ‘내장형’이다. 한국의 수도가 제주도에 있었다면 남해는 북해가 됐겠지만, 지금 제주도 사람들도 아무 생각 없이 자신들의 북해를 남해라 부른다. 지배권력에 의해 한 번 언어가 규정되면 그 언어는 이데올로기처럼 자기지시적 연장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정작 자사 기자가 일반시민으로 둔갑해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사진 조작까지 하고도, PD수첩의 몇군데 의역과 진행 과정의 말실수를 보도 전체가 왜곡된 것마냥 떠드는 <중앙일보>의 뻔뻔스러운 자신감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옛) PD수첩 팀이 느끼는 당혹과 열패감에 깊이 ‘공감’한다. 탐사 저널리즘이 ‘괴담’이라는 언어 안에 갇혀버릴 때, 언론인은 직업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 내가 비감에 젖어 발언 욕망을 잃어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권력과 신문권력의 카르텔 속에서 이성적인 언어는 질식사하고, 그 언어로 존재행위를 하는 저널리즘의 기반도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신문권력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일삼는 언어 폭력이 정작 자신의 존재기반을 흔드는 자기부정의 언어라는 점을 말이다. 권력감정만 누리면서 세상을 호리고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언론으로만 영원히 남겠다면 그마저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하지만 나 역시 나의 직업적 나르시시즘의 폐기를 좀더 유보하련다. 이 사태가 언어의 전쟁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에 나도 새 기분으로 그 전쟁에 나서볼 참이다. 중뿔난 전술은 없다. 언어의 전쟁에서 무기는 언어이므로, 줄창 발언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