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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아빠, 왜 기자가 됐어?”

“아빠, 왜 기자가 됐어?”

안영춘/한겨레 생활과학부 기자
 

지난 일요일 밤, 산행을 다녀온 고단한 몸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월요일 아침 출고해야 할 기사가 남아 있었다. 옆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던 어린 딸이 불쑥 묻는다. “아빠, 왜 기자가 됐어?” 아이와 별반 차이가 안나는 내 눈높이 덕에, 질문의 맥락은 금세 잡힌다. 툭 하면 노트북 앞에서 밤을 새는 아비가 측은해 ‘왜 하필이면’이라는 말줄임표와 함께 물은 것이리라.

“응. 아빠가 기자가 된 건 진실을 밝혀내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란다.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이런, 내가 또 무슨 짓을 했지. 아이는 다행히 고개만 갸웃할 뿐, 더는 묻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거짓대답’은 요즘 내가 겪고 있는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정체성 혼돈으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고 있었다.

기자 생활을 몇해 하다 보니, 나도 어지간히 ‘겁신경’이 퇴화했다. 그러나 유독 독자전화 받는 것만큼은 갈수록 겁이 난다. 목소리는 대개 꼬장꼬장하다. “제대로 알고나 쓴 거예요?” 때로 육두문자까지 섞어 쓰는 전화를 받으면 덩달아 목소리가 올라가지만, 속내는 겁에 질려 과장된 반응을 보인 것일 뿐이다. 드물게 칭찬하는 전화가 와도 마찬가지다. 불신도 괴롭지만 과신도 부담스럽다.

기자는 어디까지 알아야 하고 또 어디까지 살필 수 있어야 할까? 전문가의 시대다. 그래서 앞다퉈 해외연수도 다녀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적으로 게으르다. 또한 이 직업이 워낙 보따리장수 같은 것이어서 이끼가 앉을 겨를조차 없다. 달라지는 매체환경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네티즌들은 다 알고 있는 걸 나만 모르는 경우도 숱하다.

그러나 혼돈 속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정리한 게 있다. 어차피 신문·방송이 언로를 독점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젠 독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해 전문영역을 찾아야 할 때다. 나는 몰려 있고 흩어져 있는 정보를 끌어 모으고 골라서, 배움이 짧은 내 어머니 눈높이로 풀어 전하는 걸 내 전문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 기사가 나간 날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 꼭 이렇게 말씀하신다. “뭔 말인지 통 모르겠더라.” 여전히 안개 속이다.

그런데 정체성 혼돈을 겪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다만 헷갈리는 데도 정도와 수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표이사가 대주주로 있는 계열사에 세무조사가 들어왔다고 해서, 비리 혐의가 있는 자사 간부를 수사한다고 해서, ‘탄압’이니 ‘길들이기’니 하며 반발하는 건 헷갈려도 너무 헷갈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중잣대로는 더는 독자를 설득할 수 없다. 독자들은 생각보다 무섭다. 내 딸도 무섭다.

<미디어 오늘> 1999년 07월 15일
 

* 9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기자의 직업 환경이 변하고 있는 상황을 민감한 두려움으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어린 딸은 어느덧 중3이 되었고, 제 기자 생활에서도 숱한 '겪음'과 많은 '달라짐'이 있었습니다. 나빠진 거나 아닌지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