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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종편과 그 아버지들의 운명

종합편성채널(종편)들이 베이비부머인 건 틀림없지만, 도무지 옥동자라는 확신은 서지 않는다. 조·중·동·매 종편사마다 도토리 키 재듯 시청률 자랑에 팔불출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어떠랴.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했다. 다만 방송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었으면 대한민국에서는 건설사만큼 흔해빠진 게 방송사였을 것이다. 어느 분 말씀마따나 “해봐서 아는데”, 신문과 방송은 고래와 상어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겉보기와 달리 전혀 다른 계열체와 통합체로 구성된 표현 형식이어서, 서로 참조할 만한 게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건 개별 스테이션의 앞날이 아니다. 종편이 옥동자가 되든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탄식의 대상이 되든, 중요한 건 이 게걸스런 메뚜기 떼가 미디어 생태계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무엇보다 그건 내게 실존의 문제다. 내가 만드는 소박한 종이매체는 물론 내 헐거운 급여계좌에도 크든 작든 파장이 미칠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직업적 언론인인 나와 그렇지 않은 독자 여러분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종편을 저널리즘과 민주주의라는 공적 문제로 보는데, 나는 먹고사는 사적 문제로(도) 본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어쩌다 종편이 팔불출로도 모자라 박근혜 의원을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찬양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도 유력한 단서가 된다. 주류 저널리즘은 대의 저널리즘이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정상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보편적 권리로 인정돼왔는데, 그 권리의 수행 주체는 정작 소수 언론사와 언론인이었다. 그나마 대의제 정당 정치는 선출 과정을 거치지만, 저널리즘은 그조차 없이 대의자를 자처했다. 문제는 저널리즘에겐 존재론적으로 비즈니스가 필요했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특권 옹호와 선정주의라는 투 트랙을 내달렸다.

이건 종편 이전의, 그리고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종편 베이비붐 사태의 기원이기도 하다. 종합편성을 하는 방송이면서도 공적 거버넌스에서 열외나 다름없는 종편은, 그래서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다. 이미 대다수 수용자들은 지상파 공영방송에서 기대를 거두고 있고, 종편을 그것과의 단절보다는 연장으로 이해한다. 그나마 공영방송은 아직 공적 거버넌스 언저리에 걸쳐 있지만, 여기서 나는 <지킬과 하이드>의 플롯을 떠올린다. 지킬은 비가역적으로 하이드와 하나가 되어 살인을 하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다면 종편의 출현은 저널리즘 자체에 드리운 음울한 징후다. 대의 저널리즘의 지속인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저널리즘의 창출인가. 지금은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여러분 손에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