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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청소년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언론

악당이 있기에 영웅이 필요한가, 아니면 영웅이 악당을 만드는가. 이런 질문을 매우 다층적이면서 혼란스럽게 던지는 영화 가운데 하나가 <다크나이트>이다. 배트맨과 조커는 실전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서로 깊이 기대어 있다. 죄르지 루카치에 따르면, 영웅은 근대 이전의 전형적 캐릭터이다. 그런 영웅을 모던함의 문화적 상징인 할리우드가 그토록 사랑하는 걸 보면, 영웅을 대체한 근대의 법제도는 인간의 심리에 메울 수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구덩이를 남긴 혐의가 짙다. <다크나이트>는 그나마 그 구덩이 언저리에서 활극을 펼친다.

여기 또 하나의 (예비) 영웅이 있다. 언론사 신입 기자 면접시험장. 수험생에게 기자가 되려는 동기를 묻는다.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답하면 보수적인 인물이 되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답하면 진보적인 인물이 된다. 그러나 이런 2차원적인 식별법보다 진부한 건 두 답변의 공통분모인 ‘정의’의 클리셰 자체이다. 조금 과장되게 비유하면, 오늘날 언론에서 패악 대신 정의를 읽어내고 그 일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진화론을 믿는 주교에게서 신부 서품을 받으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그 영웅적 ‘간지’를 싫어하지 않는다.

‘또 다시’ 청소년 문제로 난리다. 또래 폭력에 시달리던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가슴 아픈 비극임에 틀림없다. 이즈음 정의를 수호/회복할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가. 지겨우면 영웅이 될 수 없다. 언제나 새롭다는 듯, 악을 신선하게, 그러나 정작 클리셰의 방식으로 대하라. 언론들은 이 강령에 따라, 학교 폭력이 불과 어제오늘 사이의 일이라는 듯, 늘 변하지 않는 놀란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로 악한 청소년들을 전시한다. 형사 미성년자이므로 부분 모자이크하는 애교쯤은 필수! 이제 학교를 고담시(배트맨 시리즈의 배경 도시)로 세팅하고, 숨어 있는 악한들을 찾아 나선다.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청소년 관련 뉴스가 사회면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언론의 이런 ‘활약’의 결과다. 위기는 갑자기 도래한 듯 보이지만, 그 출발점은 언론이 청소년을 ‘문제시’하는 순간이다. 노스페이스로 위계를 가르는 것도 문제고, 졸업식 날 밀가루 범벅을 하는 것도 문제다. 물론 피해 청소년들을 학교 당국이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더러 언급하지만, 그 문장은 그나마 ‘한편’으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기사는 가해 청소년을 중심으로 공격적으로 구성되고, 전개된다.

법제도와 정치사회 시스템 따위에는 무관심한 것이 영웅의 본성이다. 아니, 악한을 양산하는 그 체제는 자신을 위해 필수다. 그래서 그들은 인권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학생인권조례에는 쌍심지를 돋우고 반대한다. 그들은 다만 구덩이 한가운데서 활극을 펼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