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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엄기영은 어처구니없지 않다

<인터넷한겨레> ‘훅’에 올린 글입니다. 분기마다 한 번 정도 글을 쓰는군요. 날도 서늘해졌으니 더 자주 써볼까 합니다.


엄기영 전 문화방송 사장이 “심장이라도 빼서 지역에 봉사하고 싶다”라고 했다는 기사를 처음 봤을 때(1), 난 그것이 그다지 어처구니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표현은 과격했고, 정반대로 행동은 배알이 없었던 게 사실이긴 해도, 목숨을 건 복종 맹세는 그렇듯 언제나 모순적이다. 무엇보다 그의 ‘심장 적출 봉사론’은 그가 문화방송을 떠나며 로비에 모여 있던 사원들을 향해 “MBC 파이팅”을 외친 것과 화용론적으로 조응한다.

“MBC 파이팅”과 ‘심장 적출 봉사론’의 공통점

공영방송 사장이 부당하게 잘려나가는 게 축구 선수 퇴장 정도쯤 되는가. 그에게는 주식회사 문화방송만 있을 뿐 공영방송, 나아가 한국 사회 언론 자유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잘라 말해 소아적(小我的)이다. 또한 즉자적 조건반사만 있을 뿐 맥락에 대한 구성적 인지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나가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탄식 하나로 끝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역에 ‘봉사’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이지, 그 과정에 관한 정치성의 맥락은 고려 범위 밖이다.

얼마 전 언론학자 전규찬은 자신의 트위터(@kohemi)에 이런 글(멘션)을 올렸다. “그 전에 문화방송의 또 어떤 사장, 또 어떤 기자들에게 많은 기대/애정을 보냈다가 엄청난 실망과 분노를 느꼈었죠? 이 반복적 현상의 의미는 뭘까요? 예외적 인간들을 보고 있는 건가요, 아님 일정한 패턴의 군상을 보고 있는 것인가요? 대체 이들은 누구?” 한때 한국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로 이름을 떨쳤던 문화방송 홍보 책임자 이진숙의 행태(2)에 대한 실망과 비난 여론에 전규찬이 던진 질문이었다.

이들과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나로서도 당연히 이 질문에 호기심이 갔고 답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다. 엄기영이 됐든 이진숙이 됐든, 그들의 행위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사회구조적이며, 특이한 한국 저널리즘의 알레고리라는 전제에서 생각을 시작해 봤다.

 

예외적 인간인가 집단 군상인가

따라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부인의 이름뿐인 사회활동과 그 이름보다 짭짤한 부수입까지 챙긴 언론사 출신 인사가 설령 있다고 해도, 나는 그의 이름을 ‘신재민’이라고 굳이 부르고 싶지 않다. 이 글에서 다룰 본령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난받는 언론사에서 패악질을 일삼는 현직 종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축은 논(論)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저 척(剔)의 대상일 뿐이다. 상대적으로 평판이 나은 언론사에서, 대중의 큰 관심을 받는 몇몇 종사자들의 욕망이 언론의 내적 구조와 어떻게 만나 어떤 행태로 발현되는지 더듬을 수 있으면 족하다.

기자, 피디, 아나운서는 각각 언론인의 부분집합이다. 그렇다고 언론인이 이들 세 직능의 합집합은 아니다. 시민기자나 독립피디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기자, 피디, 아나운서는 소속 언론사가 있다. 그러나 모든 무인(武人)이 ‘왕의 남자’인 것은 아니듯이, 소속 언론사가 없는 언론인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겨레>에 칼럼을 쓰는 전 한국방송 사장 정연주나 전 <한겨레> 논설주간 김선주는 현재 소속 언론사가 없지만 칼럼에 언론인이라는 직함을 쓴다. 언론인은 직능을 넘어선다. 저널리즘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행하는 이가 언론인이다. 장폴 사르트르, 앙드레 고르, 리영희(3) 같은 이름에서 언론인과 사상가는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개념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한국의 현실 물정은 이런 개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 언론인은 이들 세 직능과 어떤 현재적 집합 관계도 없다. 언론인은 ‘전직 기자/피디/아나운서’이자 ‘현재 무직’이라는 교집합의 이름으로 ‘변형생성’ 된다. 현직 기자/피디/아나운서도 그렇지만, 언론사 출신 정치인이나 정무직 관료, 교수도 자신을 언론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바로 여기가 한국에서 언론인이라는 기호 대 직능 및 전직(轉職)의 기호 사이에 정치성이 발현되는 지점이다. 위상 관계는 완전히 전복된다. 사르트르, 고르, 리영희라는 이름도 현실에서는 뒷방으로 나앉고 만다.

무엇보다 발언권의 격차가 두드러진다. 언론인의 발언권은 과소 대표되고, 직능의 발언권은 과잉 대표된다. 동아투위 언론인들이 30년 넘게 동아일보사 앞에서 해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기념집회를 열면서 늙어왔지만, 이들을 해고한 <동아일보>는 물론 대부분의 언론이 기사 한 줄 내지 않는다. 대신, 동아일보의 파릇파릇한 기자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자사 소속 기자에 대한 사주의 탄압이 아닌 독재정권에 대한 사주의 항쟁으로 둔갑해 쓰는 기사는 대서특필된다.(4) 언론인은 타자화의 호명이고, 직능은 정상성의 이름이다.

 

과소 대표되는 언론인, 과잉 대표되는 직능

이는 강단 정규직 입직 이전 ‘학자’ 대 입직 이후 ‘교수’의 관계와 상동적이다. 언론계와 학계의 차이라면 선형적으로 ‘배제’가 어느 단계에서 이뤄지느냐 정도의 차이다. 언론인은 직능 이후의 존재이지만 학자는 직능 이전의 존재다. 언론인은 폐허 속으로 퇴출되고, 학자는 좁은 문 앞의 잉여 상태에서 발버둥친다. 양쪽은 데칼코마니 작품의 각 한쪽 면을 담당하며 한국 사회 지식인계의 고유한 풍경을 구성한다. 바늘구멍 사진기처럼, 상위의 개념은 소외와 배제의 상으로, 하위의 개념은 특권과 독점의 상으로 전복돼 맺힌다.

언제부턴가 여대생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보면 가장 닮고 싶은 여성으로 현직 방송 앵커가 꼽힌다. 문화방송 여성 앵커 김주하는 트위터 팔로워만도 수만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여성 앵커가 그만큼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그들이 대중에게 언론업 종사자의 사표로 비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앞의 이진숙이나 얼마 전까지 청와대 대변인 노릇을 한 김은혜도 방송 기자(와 앵커)로서 명성을 누렸다. 한때 그 영광스런 자리에서 장수했던 백지연은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 홍보 광고는 여느 예능 프로그램 못지않게 선정적이다.

방송 뉴스에서 다분히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 앵커가 여대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 양성 불평등의 구조를 감안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치인이나 기업 경영인 가운데서 여대생의 롤 모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방송 저널리즘은, 내부의 실상이 어떻든, 시각적 노출에 있어서 압도적인 남성 우위는 아니다. 그러나 더욱 눈여겨볼 대목은 전규찬의 지적대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무 예고나 징후도 없이 단절적으로 대중을 실망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들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엄기영은 오랫동안 문화방송 뉴스의 상징이었다. 2007년 대선 민주당 후보였던 정동영도 그랬다. 한국 언론계의 어두운 이면을 신랄하게 고발했던 문화방송 <사실은>의 진행자 신강균도 있다. 그는 동종업계인 서울방송의 지배주주사 태영으로부터 명품 핸드백을 받은 것이 기이한 내부고발로 들통났다.(5) 남성들이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 않고, 실망을 주는 강도도 훨씬 세다. 그러나 양성 불평등의 구조는 이처럼 외설적인 사태에서도 드러나지만, 그 외설성의 발현 기전은 남/녀가 동일하다. 직능에 들씌워진 신성성이 인장 강도를 넘어서 파열하고 마는 것이다.

 

기자, 피디, 아나운서라는 신성가족

기자/피디/아나운서의 직능은 신성한가? 가령 한국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라는 타이틀은 신성의 상징일 수 있는가? 그녀의 리포트는 서방 언론의 그것과 얼마나 어떻게 달랐던가. 그녀의 시선은 전쟁의 참극을 죽음과 부상, 기아, 질병으로 치러야 했던 이라크 인민들에게 구체적으로 다가가 있었던가. 그리하여 침략 전쟁 반대의 메시지가 명백하게 구성되었던가. 그녀는 주식회사 문화방송의 한 종사자로서 당해년도 최대의 실적을 성취했는지 몰라도, 언론인으로서 전쟁에 대한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지 못한 채 몰가치적 스펙터클을 구현했을 뿐이다. 그녀는 유능한 직장인이며, 직장의 홍보 책임자가 된 지금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하고 있다.

직능의 신성화는 현직의 발언권이 독점화되다시피 과잉 대표되는 현실과 깊이 닿아 있다. 신성은 독점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의 공식적 발화는 철학, 사상, 윤리와 완전히 별개다. 손에 쥔 확성기로 소리를 내기만 하면 그 소리가 곧 그 자신이 된다. 그들은 삶을 통해 철학, 사상, 윤리를 일관되게 성찰하고 실천했던 언론인과도 경합하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제시한 입론은 이 경우 정반대로 재현된다. 개인의 도덕성과 상관없이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조직이 구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의 저널리즘은 컴퓨터의 모듈과 키트처럼 ‘기능적’ 결합으로 작동한다. 회로는 폐쇄(독점)돼 있다. 폐쇄회로 내부에서는 얼마든지 모듈과 키트를 교체할 수 있다. 한국 최초 여성 종군기자는 홍보 책임자가 돼서도 기능적으로 작동한다. 중요한 건 그들의 욕망이다. 그들은 회로 설계도를 참조하며 욕망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육용 컴퓨터의 회로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게임용 컴퓨터로 옮겨갈 수도 있다. 어제의 사장님은 오늘 지역사회를 위해 심장 적출을 감행하려 한다. 이렇듯, 신성화된 저널리즘은 정작 물화된 저널리즘이다.

이런 장광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부분적 사례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다. 언론 현업 종사자의 대다수는 오늘도 ‘가치’로서의 저널리즘을 부단히 지향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각별히 부언한다. 그러나 그런 종사자들도 늘 의문을 품어봐야 하지 않을까. 어처구니없는 건 엄기영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런 부류가 언론계의 주류라는 사실에 대해서. 폐쇄된 특권적 발언권을 해체하지 않고서도 온전한 저널리즘과 언론인의 위상/관계를 복원하는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물론, 그런 건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는 수 없지만.

 

<각주>
(1) <한겨레> 2010년 9월 9일치.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38847.html)
(2) 4대강 사업을 다룬 <PD수첩> 방송 보류에 대해 그는 “사실 관계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을 내보내는 것이 시청자에 대한 공정방송 실현의 책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밝히며 외압 의혹을 일축했다.
(3) 사르트르는 <현대>(Le Temp Modern)라는 잡지의 발행인이었고, 정치생태학의 창시자인 고르는 <렉스프레스> <누벨 옵세르바퇴르> <레탕모데른> 출신 언론인이다. 리영희는 <합동통신>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 고문을 지냈다.
(4) <동아일보>는 거의 해마다 창간기념일(4월 1일)이 되면 자사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때마다 자유언론실천선언과 백지 광고 사태를 자랑스럽게 언급한다. 기자 해직 문제가 거론될 때는 “일부 기자들의 해고라는 비극을 감내해야 했다”, “언론탄압에 저항한다는 대명제는 같았으나 투쟁 방법에 대한 의견이 달랐기에 비롯된 아픔이고 불행이었다”(2004년 10월 29일치 사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5) 2004년 말 신강균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 비리를 폭로한 태영 쪽 고위 관계자로부터 술 접대와 명품 핸드백을 받았다. 이 사실은 그 자리에 동석했던 기자 이상호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관련 글을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