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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군복 애착증을 위한 변명


 

그들의 군복 입은 모습에서는 백전노병의 이미지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군복을 입었을 테지만, 그들의 입성은 그들이 기대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뜻대로 대변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국자’의 기호를 기획했다. 그러나 그들의 군복 애호는 차라리 코스프레(만화나 게임의 주인공으로 분장하는 취미)나 복장도착(이성의 옷을 입는 데서 성적 만족이나 흥분을 얻는 성향) 같은 특이한 취미와 성향으로 읽히고 있다.

군복 주름에 날을 세워 입고, 그들은 미성숙한 어르신의 극치를 보여준다. 군인의 삼엄한 이미지는 실종되고 날건달의 이미지만 남는다. 하지만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개가 된다’는 말은 이 경우엔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다. 의미로는 되레 정반대다. 대개 예비군복은 ‘일탈’을 뜻하지만, 그들에게는 ‘정상성으로의 귀환’이다. 그들에게 평상복을 입어야 하는 평화로운 일상은 오히려 비정상이다. 군복을 차려입고 민간을 상대로 물리력을 행사할 때라야 비로소 존재의 질량을 얻고, 찰나적으로나마 정상화된다.

그들의 언행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가 과도해서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군복에는 그런 상징이 들어앉을 공간이 없다. 이를테면 휴머니즘이 순식간에 애국심으로 전치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마지막 장면 같은 후진 미장센조차 담아낼 수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에게는 국가, 나아가 국가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상한 병역 미필자들에게 베푸는 그들의 ‘관용’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들은 최소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조차 수행하지 않은 국가체제 기득권자들을 오히려 맹종한다. 미필 총리의 “어느 나라 국민이냐”는 말 한마디에 참여연대 앞으로 몰려가 쑥대밭을 만드는 이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국민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구성된 국가권력을 10년 동안 인정하지 않았고, 그 시간만큼을 다만 ‘잃었다’고 여긴다. 하물며 그들은 군(軍)조차 사랑하지 않는다. 생떼 같은 후배 군인 마흔여섯 명이 몰사했지만 그 죽음의 진실에 무관심하다. 아니, 진실 추구를 완력으로 가로막는다.

그들은 정작 국가적인 것과 무관한 일에 주로 개입한다. 2년 전 ‘언론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며 한국방송공사(KBS)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여성을 각목으로 두들겨 패 응급차에 실려 보낸 데서도 국가적인 것은 찾기 어렵다. 그곳이 국가기간방송사 앞이었기 때문일까. 국가기간방송사 앞에서의 1인 시위가 그 앞에 가스통 들고 떼지어 몰려가는 것보다 반국가적일 리는 없다. 그들이 국가적인 것에 반응하는 경우는 독도를 두고 일본과 갈등이 불거졌을 때뿐이다. 그러고도 일본군 위안부 사과·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잠잠하다. 어쩌면 그런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나 좀 과장되게 말하면, 나는 그들의 순수함을 믿는다. 적어도 거의 매일 신문 방송으로 접하는 누구누구처럼 교언영색으로 거짓을 일삼지는 않는다. 그 누구누구에게 직·간접으로 고용돼 단체로 생계형 알바를 뛰는 것으로 볼 만한 단서도 없다. 나는 10년 전쯤 그들로부터 뭇매를 맞아본 적이 있다. 대역 배우는 절대 흉내낼 수 없는, 노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의 진정성이 온몸에 전해졌다. 그렇다고 그들의 신념을 ‘진정성’이라고 말할 뜻은 없다.

사회학자 김홍중에 따르면, 진정성(authenticity)의 주체는 공동체가 부과하는 도덕률을 즉각적으로 수용하지도 기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으며, 도덕과 자신 사이에 성찰적 거리를 만들고 가능한 행위의 준칙들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 위한 고민을 실천한다(<마음의 사회학> 2009). 진정성은 자신과의 대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대신 그들의 행위 준칙은 ‘신실성’(sincerity)에 의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실성은 성찰이 없는 일방적 수용이다. 진정성은 ‘윤리’를, 신실성은 ‘도덕’을 구성한다. 정교하게 말하면, 나는 그들에게 진정성의 뭇매가 아니라 신실성의 뭇매를 맞았고, 그들은 내게 내면으로 개활된 윤리가 아닌 폐쇄 집단의 도덕으로 린치를 가했다. 그들은 나를 마땅히 때려야 했지만, 나는 왜 맞는지 알 수 없는 인지의 비대칭이 형성됐다.

그러나 그들을 진정성의 주체와 구분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의 고유함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그들이 이 시대를 상징하는 ‘속물적’ 주체의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성의 자리를 물신에게 넘겨준 이 시대에 적응하고 사는 일은 진정성을 포기하거나 망각하는 일이자 물신의 부름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일이다. 그렇게 이 시대의 압도적 우점종이 된 속물의 군상과 그들 군복 입은 군상은 다르다. 그들은 물신화된 사회에 ‘몫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의식은 속물 사회의 도래조차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진정성은 공백 상태이고, 그들의 신실성은 동시대의 신실성과 어긋난다.

그런데도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극우 쇼비니즘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기묘한 동거에는 이들 군복 입은 자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무한경쟁과 우승열패의 게임이 벌어지는 속물적 신자유주의 체제의 동력은 과잉 욕망이다. 그 욕망은 처음부터 총합으로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개별 주체들에게도 달성 불가능하다. 달성 불가능한 집단적 욕망은 위기를 일상화한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위기를 관리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위기의 임계점 직전에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부정하고 정치적 동원에 나선다.

몫이 없는 자들은 언제나 호명의 1분 대기조다. 이때가 일상에서 몫이 없던 자들이 존재감을 얻는 찰나적 순간이다. 그 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그들은 자신의 모든 신실성을 던져 가스통이나 똥오줌통으로 무장하고 강력한 백병전을 벌인다. 그들의 백병전은 성격을 불문하고 모든 위기를 빨갱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으로 바꿔놓는다. 그러나 정치적 동원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빨갱이를 색출하면 안 된다. 개별적 색출 뒤에는 집단적 색칠이 불가능하다. 그들의 임무는 색출하는 데 있지 않고, 색칠하는 데 있다. 목적이 달성되면 그들은 다시 서둘러 물신의 세계 밖으로 수거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극우 쇼비니즘 사이에 유지되는 평화는 위계에 의한 평화다. 그들 군복 입은 자들은 지배 권력에게 결코 위험하지 않다. 그들에겐 몫이 없지만 자신의 몫을 누가 약탈했는지 알지 못하기에 저항을 표출하지 않는다. 다만 분노를 배설하고자 할 뿐이다. 그들에겐 물질적 보상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처음으로 고엽제 장애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해준 정권을 오히려 인정하지 않았다.) 때때로 정치적 동원을 통해 아무 데나 난장을 열어주면 되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숭고한 영혼’이라며 주기적으로 마사지만 해주면 된다. 일상은 속물주의의 승자가 지배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열리기 전에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은 국가 자체였다. 그들은 혈기왕성할 때 용병으로 불려나가 식민전쟁의 대리전을 치렀다. 그들의 전쟁 상대는 적군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도 대상이었다. 비무장 민간인 학살 행위는 국가에 의해 ‘반공의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승인됐고, 적극적으로 요구되기도 했다. 그때 그들의 영혼도 함께 살해됐다. 주술에 의한 자해였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진실과 대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살해된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끔찍한 일이다. 진실은 알아서도 안 되고 알려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마치 유기된 좀비와 같다. 진실의 영혼을 살해당하고 텅 빈 육신만 살아 있는 이들에게 이 사회는 온당한 몫을 할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진전된 이후에도, 다시 민주주의가 퇴행한 지금도 국가든 다른 누구든 그들의 취약함을 끝없이 이용하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그들을 자유와 애국의 이름으로 호명해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그때마다 그들은 군복을 차려입고 민간인과 전쟁을 치른다. 속물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성전이지만, 그들은 그 속물들을 위해 싸운다.

그들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인터넷한겨레> ‘훅’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