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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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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설스런 블랙리스트, 비장한 성희롱 7월에 써놓은 글인데, 이제야 포스팅을 한다. 심리적으로 무척 불안한 상태(지금도 마찬가지지만)에서 쓴 글이어서, 엎어진 쓰레기통 같다. 고쳐보려고도 했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버리려고도 해봤지만 이 또한 내 흔적인 것을…. 다음엔 잘 쓰면 될 거 아닌가, 라고 자위하며…. 상업 언론의 호들갑은 이따금 코미디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요즘 한국 언론의 데시벨이 높은 것을 언론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어도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저널리즘의 경구를 떠올릴 것도 없다. 세상이 코미디라면 그 세상을 재현하는 언론도 구조적으로 코미디 장르를 벗어날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추문’이라는 이름의 꽃밭에 한꺼번에 꽃이 피고 있는 형국이다. 현 정권 구성 세력을 비롯..
결혼식 축시 두 편 2008년 늦가을과 2009년 봄, 후배들 결혼식에서 축시를 지어 읊은 적이 있다. 두 짝 모두 잘 살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축시 덕분이다(라고 생각하려니 멋쩍다^^). 아니다. 이 따위 축시를 무릅쓰고 잘 사는 건 오로지 그대들의 개척정신 덕분이다. 뒤에 결혼한 짝이 오늘 결혼 500일이 되었다고 한다. 딴 데 버려두었던 그 때 시 두 편을 찾아 입김을 후후 불어 먼지를 털고 여기에 옮긴다. 액땜이다^^ 결혼의 리얼리즘 솜사탕은 천원이다 열 개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사랑은 밥 먹여주지 않는다 부득부득 아등바등 사랑한다는 건 경제학이 아니다 800 헥타 파스칼과 1200 헥타 파스칼 사이 비바람 폭풍우 몰아치는 청춘의 기압골을 빠져나와 선남선녀 연적들의 막강 포백 시스템을 헤쳐나와 피붙이 일가붙이들 ..
말 바꾸기의 위생학적 이해 이별하는 연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몇 가지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가 ‘말 바꾸기’다. “영원히 너만 사랑할 거야”라는 숱한 맹세는 그 통과의례를 거치는 순간 빈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별을 눈앞에 두고 상대방 말의 일관성 없음을 문제 삼는 짝은 드물 것이다. 비록 악감정에 복받치더라도, 상대가 악질이 아닌 한, 지난 밀어의 진정성만큼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작업성’ 코멘트를 포함한) 사랑할 때의 언어와 (쿨함을 가장한) 이별할 때의 언어가 서로 어긋날지언정, 그들에게 두 언어는 모순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세상은 말을 바꾸는 행위를 흔히 윤리의 잣대로 재단하지만, 말 바꾸기 자체가 윤리성의 문제일 수는 없다. 말 바꾸기에 윤리를 적용하는 일이 조자룡의 헌칼 쓰기 같아서는 안 된다. 말을 바꾸..
황새울은 ‘법대로’인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지금 그곳은 그저 땅 이름이 아니다. 봄이면 모를 내고 가을이면 걷이를 하던 황새울 너른 들은 더는 농사짓는 땅이 아니다. 설령 올해 농작이 이뤄진다 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은 이미 한국사회 안팎의 모순이 복합적이고도 다층적으로 한 데 응축돼 충돌하는 정치 현장의 이름이며, 교과서에서 보고 배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새삼 따지고 복기해볼 수 있는 생생한 체험 학습장이기도 하다. 왜 이곳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논과 밭, 그리고 집에서 내쫓기는 처지가 됐을까? 그것도 불법이 아닌 당당한 법의 이름에 의해서 말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행위가 오히려 불법이 되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두고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은 무엇일까? 당신들이..
개혁물신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상상 -5·31 지방선거를 보고 열린우리당의 5·31 지방선거 참패에 언론들이 내놓은 정치공학적인 설명은 대략 이렇다. 뿌리 깊은 지역주의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지지 기반, 이를 만회하기 위한 보수적 정책 노선이 불러온 지지층의 이탈, 오만한 태도와 편가르기식 개혁에 대한 유권자들의 정서적 반감, 형편없는 경제지표…. 말하자면, 열린우리당의 참패는 ‘예정된 결과’였던 셈이다. 선거 결과에 대한 모든 정치공학적 해석이 ‘그럴 줄 알았다’ 식인 게 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언론들은 이런 예정된 결과를 주권자인 국민이 열린우리당을 ‘심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럴듯한 얘기다. 선거 결과에는 분명 민심이 담긴다. 그렇더라도 ‘선거 결과는 민심의 반영’이라는 명제가 반드시 성립하는 건 아니다. 민심은 복잡한 ‘화..
삶의 총체성에 묻는다. 그대는 다운시프터인가? - MBC 심야 스페셜 를 보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초등학생 때 ‘우리나라의 70%는 산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배운다. 내가 그 지식을 머릿속에 새길 무렵, 대한민국의 대표 유행가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로 시작하는 남진의 ‘임과 함께’였다. 산악 지형의 국가에서 태어나 저 푸른 초원을 동경하며, 나는 공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나를 비롯해 이 나라 사람들이 느낀 공복감은 초원을 향한 동경이 아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의 옛 버전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둘은, 그 뿌리가 ‘번듯한 내집’이라는 데서 하나다. 나 또한 초원보다는 그저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작은 공부방 하나를 갈망하며 단칸방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많은 이들이 도시생활에 넌더리를 낸..
사랑하라, 바로 지금 -MBC 베스트극장 ‘새는’을 보고 사랑했던 이의 부음을 접하는 상진의 모습은 뜻밖에 담담하다. 지금, 사랑의 열병을 한창 앓고 있는 그대는 먼 훗날 상진의 처지가 되었을 때 그처럼 홀연히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할 것이다. 미소까지 살며시 머금은 그를 보며, ‘상진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었을까’ 의문을 품어봄 직도 하겠다. 하지만, 그런 의문 따위는 집어치워라. 사랑의 모습은 어느 것 하나 정형화되지 않느니, 그대가 경험한 사랑은 다른 사랑에 대해 어떤 판단의 잣대도 되어주지 못한다. 사랑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상진의 사랑은 외사랑이었다. 외사랑의 주체이자, 외사랑의 대상. 그의 사랑에는 세 사람이 관계되어 있지만, 흔한 신파의 삼각관계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오시오 아파트’를 꿈꾸다! - MBC 베스트극장 ‘오시오 떡볶이’를 보고 어느 대기업 아파트 광고의 메인 카피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파트’이다. 여기서 가족은 ‘정상 가족’에 한정된다. 아파트가 1인 가족의 생활양식을 대변하는 주거 형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파트 광고의 컨셉으로 ‘가족주의’가 동원되는 것은 확실히 한국적이다. ‘아파트 가족주의’는 어쩌면 가족주의가 가족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국적 현실과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관계 위에서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는 정작 얼마나 많은 남편과 아버지를 가족들로부터 빼앗는 결과를 낳았던가. 가족주의가 가족 구성원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모로 명백하다. 우리는 헌법상 주권자로서 많은 기본권을 가족주의 국가체제 아래서 유린당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