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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부치지 못한 편지-김만배 돈거래 사건에 부쳐

<한겨레> 편집국 고위간부의 김만배 돈거래 사건으로 신문사 내부가 큰 혼란에 빠졌을 때 고심을 거듭해 쓴 글인데, 끝내 발표하지 못했다. 일기처럼 기록으로 남긴다.

 

논설위원실에서 일하는 안영춘입니다.

 

엄혹한 시기에 동료 여러분께 글을 띄웁니다. 제가 대단한 탁견이나 평정심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저도 서글프고 두렵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고 눈앞이 아득합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말길을 열려고 먼저 나서지 않으면 이 무겁고 단단한 침묵의 결계가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실명으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모든 제 글에 바이라인을 붙이면서 이 글만 예외로 할 명분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비판이면 모를까, 말 걸기이자 나름 참회록이기도 한 글이 익명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악몽이어도 좋으니 부디 꿈이기만 했으면 하고 생각해본 게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바람임을 처음부터 모르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더러 들리는 헛헛한 웃음소리에도 깊은 신음이 배어 있음을 느낍니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다만 극심한 충격과 고통을 삼키거나 토로하는 데 그친다면, 기껏해야 동어반복밖에 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제 글을 열고자 합니다. 그 무한루프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고 긴급하게 요구된다고 믿어서입니다.

 

충격과 고통은 같다 해도, 그것을 대면하는 태도까지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 사태의 장본인들을 향한 ‘연민’이 앞서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오랜 시간 함께 웃고 울었던 동료이다 보니 머리로는 알면서도 무의식까지 다잡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감정은 자칫 자신한테로도 향합니다. 자기연민은 자기혐오와 자석처럼 양극을 이뤄 악순환의 회전운동으로 빨려들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상황을 축소하거나 부풀려 판단한다면 진단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태의 장본인들에게 ‘적대(敵對)만 앞세워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외려 경계해야 합니다. 적대 감정에만 매몰되면 저들을 종양처럼 서둘러 제거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질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한갓 백일몽입니다. 단언컨대, 이 사태의 책임을 개인화하는 것으로 끝내면 우리에게 돌아갈 과거는 없습니다. 연민이냐, 적대냐. 저는 이 양극의 감정을 ‘연루 의식’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연루 의식이라는 표현은 이 사태를 우리의 지난 시간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에서 애써 찾아 쓴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과 얼마나 같거나 다른지는, 성경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짧아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다만,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직접 당사자에게만 지우는 ‘개인화’는 물론이고, 공적 차원에서 크고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주체들과 일반 구성원을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것과도 전혀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래와 상어만큼이나 다릅니다.

 

‘성인지 감수성’이 그렇듯, 연루 의식은 연민과 적대 같은 즉자적 감정과는 층위가 다른 ‘인지적 감수성’입니다. 그만큼 의지적이어야 하고, 당연히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연루 의식은 충격과 고통을 대면하는 우리 내부의 태도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돼줄 것입니다. 그 실마리를 붙들어야 비로소 태도의 차이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차이를 좁히고 다시 ‘힘’으로 전화함으로써 새로운 앞날을 탐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내부는 이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두고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대표이사 선거를 애초 일정대로 치러 새로운 리더십을 서둘러 세우자는 입장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개혁 작업부터 철저히 거치자는 입장이 갈립니다. 얼핏 절차와 순서의 차이쯤으로 비칩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 일제 강제노역 해법을 두고 벌어지는 ‘병존적 채무 인수 방식’과 ‘전범기업 사과와 배상론’의 갈등이 떠올랐습니다. 그 와중에 대표이사 선거는 저대로 시작됐습니다. 

 

저는 우리가 맞닥뜨린 이 잔혹극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인식’의 차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차이의 뿌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잔혹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저 ‘사건’일까요? 아닙니다. ‘사건이자 사태’입니다. 하늘에서 별안간 떨어진 게 아니라 앞선 시간들에 차곡차곡 예비돼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진상규명 활동과 이후 수립해야 할 여러 대책도 모두 ‘사건인 동시에 사태’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다름아닌 연루 의식이고요.

 

철저한 진상규명은 ‘사건이자 사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어땠습니까. 핵심적인 팩트조차 세 차례나 수정해야 했습니다. 더는 수정할 일이 없을까요?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도, 거듭해서 팩트를 수정할 때도 늘 상상의 범위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팩트의 전모를 파악했노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장담할 수 있는 건 밖에서 새 팩트가 또 터지면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입니다. 하물며 ‘사태로 건너가는 다리’도 끊기고 맙니다.

 

매번 섣부른 대처가 화근이었습니다. 석진환 기자를 서면 소명서만 받고 해고 의결부터 하고는 결국 대면 조사 한번 못하고 그 해고를 실행해야 했습니다. 서두르다 보니 섣불러졌을 터입니다. 대표이사를 위시한 경영진의 ‘사퇴 선언’에도 조급증이 역력합니다. 타조가 위기를 외면하려고 머리만 덤불에 박은 채 꼬리를 치켜든다는 뜻의 사자성어 ‘장두노미’(藏頭露尾)가 떠오릅니다. 사퇴인 듯 사퇴 아닌 사퇴 같은 선언으로 한겨레는 지도부 공백 속에 사실상 연명치료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이 조바심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충격과 고통이 너무 크고 강력한 탓일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짐작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우리 구성원들은 본디 눈앞의 갈등적 현안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여럿이 이름을 올린 성명서가 하루가 머다고 발표된 게 불과 몇 해 전입니다. 지금은 길고 무거운 침묵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지각 아래에서는 뜨거운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을 테지요. 다만, 혼란이 빨리 안정되기 바라는 조바심이 지각을 구성하는 핵심 물질이 아닐까요.

 

다 같이 심호흡 한 번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냉철하게 자문해보는 겁니다. 이 사태를 개인의 일탈로 국한하고 싶은 조바심이 우리 집단 무의식에 숨어 있지 않은지를. 그렇게 개인의 일탈로 처리하고 나면 우리는 툴툴 털고 희망찬 미래를 향해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바라는 것은 아닌지도. 그런데, 한겨레가 긴 시간 비탈면을 타고 맥없이 흘러내리다 마침내 벼랑 아래로 추락한 게 이번 사태라면? ‘연루 의식’을 붙들고 ‘사건이면서 사태’이자 ‘서사적 맥락’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라도 가혹하게 자신을 추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시나브로 서로에게 관대해지지 않았습니까. 소소한 일탈에 무심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윤리적 방화벽이 낮아지는 만큼 기득권과의 거리는 좁아지고, 어느덧 기득권에 곁을 내주지 않았습니까. 제 아파트와 자식 학군을 주거약자의 주거권과 교육 평등에서 분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특권세력에 대한 비판을 한갓 진보 언론의 알리바이로 쓰고 있지 않습니까. 한겨레는 어느덧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아닙니까.

 

모든 구성원이 그렇다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번에 일탈 행위가 드러난 당사자(들)만이 주어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들)가 한겨레 내부의 엘리트 간부 그룹에 속한다는 건 우연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간부들로 갈수록, 선배들로 갈수록 혹독하게 비판받고 스스로 되물어야 합니다. 각별히,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다수의 무구한 동료들까지 이 끔찍한 후과를 겪고 계신 것에 대해, 그분들의 헌신 위에서 한줌 명예를 누려온 저부터가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경영진의 무책임도 ‘연루 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합니다. 대표이사는 이메일로 사내 구성원들에게 사과했습니다. 눈에 띄는 표현은 예의 ‘한겨레 1호 사원’ 말고 없습니다. 부디 나르시시즘이 아니길 바랍니다. 대표이사뿐 아니라 지난 3년 사이 경영에 몸을 담았던 모든 이들은 한겨레가 창간 정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심력을 가속한 것에 대해 도의적 책임뿐 아니라 실질적 책임도 막대합니다. 이번 사태의 중핵으로 향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고 있는 대응 태도도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루는 1년, 아니 10년과 맞먹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경영진이 제시한 일정표대로라면 우리에겐 실무적 공백을 메울 장치조차 없습니다. 대표이사 선거를 2월 초에 치른 뒤 당선자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3월 주총까지 형식적인 임무만 수행한다는 결정은 도저히 위기대응 전략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비상한 대안은 검토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자, 경로화된 외통수입니다. 비상한 대응을 선택지에서 배제한 건 우리가 아닌데, 어느덧 우리의 상상력도 그 경로에 갇혀버린 듯합니다.

 

대표이사 선거가 이 사태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집단지성의 용광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 경험과 양심은 그렇지 않다고, 외려 정반대일 거라고 말합니다. 첫째, 물리적 한계입니다. 후보들이 우리의 깊은 병증을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합니다. 둘째, 대표이사 선거는 민주적인 형식이 무색하게 앙시앵레짐을 재생산하는 역기능이 심각합니다. 지난해 말에 출마자 제한 장치를 요구한 양대 조합의 문제의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대표이사 선거가 시작되면 우리는 지금보다 한층 심각한 침묵의 나선으로 빨려들 공산이 매우 큽니다. 창사 이래 초유의 위기 속에서도 사내 구성원 다수는 선거 과정에서 숫자로 환산되는 타자이기 십상입니다. 또한, 어떤 근본적 문제 제기나 합리적 주장도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지 않은지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분위기가 더 팽배해지지 않을까요. 지금 쓰고 있는 제 글은 옴짝달싹할 수 없이 그 혐의에 갇힐 것입니다. 몹시 지독한 정파적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의 글이니 더욱 그럴 테지요.

 

70대 중반의 홍세화 전 기획위원께서 지난 한 주 점심 무렵 1시간30분씩 신문사 앞 응달진 곳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일인시위를 하셨습니다. 18일에는 노구에 탈이 나서 하루 건너뛰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홍 선배께 다가가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홍 선배는 사태의 본질과 기술적 문제가 뒤얽혀 논란이 빚어지는 모습을 개탄하셨습니다. 그런 홍 선배의 꾸짖음을 대표이사 선거와 연계한 정치적 음모론이 귀에 들립니다. 무참하고 또 무참합니다.

 

18일 저녁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에 찾아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가느라 앞부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격한 주장이 오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내외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졌습니다. 노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안개처럼 깔린 듯했는데, 제 눈에는 우리 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로 비쳤습니다. 근본적 질문을 해야 할 때에 기술적 질문만 가득했습니다. 불길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우리 고민이 기술적 수준에 머물면 벼랑 아래로 떨어진 한겨레의 위상도 불변의 기본값이 될 거라고.

 

“내 지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내 의지는 낙관주의적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썼고,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들도 애용했던 말입니다. 지금 제게는 저 말이 우리 내부의 차이를 냉철하게 응시한다면 우리의 충격과 고통을 한 차원 높게 승화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못하겠다는 백 가지 이유보다 해야 한다는 한 가지 이유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 가슴 속에 끓고 있는 마그마를 지각 아래에 이대로 묻어둬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 합니다.

 

홍세화 선배의 당당한 태도에 저의 한줌 용기를 보태 글을 쓰게 됐음을 끝으로 밝힙니다. 두서없는 넋두리 글을 참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안영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