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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그동안 고마웠습니다-기키 기린을 추모함

앙:단팥 인생 이야기(2015)

일본 배우 기키 기린이 얼마 전 타계했다. 그녀의 연기에 깊이 매료돼 있었으면서도 그녀가 십수 년 암으로 투병해온 사실은 부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영화 속 페르소나에 몰입해 개인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사시(斜視)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본 적이 있는데, <앙:단팥 인생 이야기>(이하 <앙>)를 보면서 그게 실제 장애인지 아니면 연기인지 궁금해서였다. 2003년 왼쪽 눈의 망막이 박리돼 실명하면서 그리됐다고 한다. 2015년 작품인 <앙>은 기키의 필모그래피에서 비교적 근작이다. 이전 여러 작품에서 그녀의 장애를 알아채지 못한 사정을 내 관찰력의 한계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키만의 고유한 연기에서 이유를 찾는 게 더 설득력이 클 거라고 생각한다.


‘메소드 연기’는 배우가 배역과 완벽한 하나를 이루는 내면 연기를 이른다. 정찬의 단편소설 ‘가면의 영혼’에서는 주인공인 연극배우가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데, 어느 순간 직전 출연작인 <오셀로>의 이아고에 빙의된다. 주인공은 이아고의 가면을 채 벗겨내지 못한 상태에서 보름 만에 오이디푸스의 가면을 쓴 터였다. 소설의 세묘만 읽고서는 배우가 배역과 동화되고 분리되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처절한지 실감하지 못했지만,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연기의 밀도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하다. 히스 레저는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에 동화되기 위해 한동안 조커의 입장에서 일기를 쓰고 자학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물 오용으로 숨진 것을 두고 조커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그럴싸한 헛소문이 퍼질 만큼, 그가 재현한 조커는 메소드 연기의 정수로 꼽힌다.


도쿄 타워(2007)

그래서인지 메소드 연기 하면 엄청나게 센 캐릭터가 연상된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앤서니 홉킨스 분)처럼 광기를 띤 주연급 배역이라면 가장 맞춤하다. 그다음이 신체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이 경우 악역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앤서니 퀸이 <노틀담의 꼽추>에서 시종 허리를 구부려 연기한 척추장애인 콰지모도나 문소리가 <오아시스>에서 얼굴과 온몸을 뒤틀어 연기한 뇌성마비장애인 한공주가 그렇다. 그 기준을 적용하면 기키의 연기는 메소드 연기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녀의 연기 가운데 가장 강렬한 동작으로 기억되는 건 <도쿄 타워>에서 항암치료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장면이다. 이마저 영화 전체로 보면 극히 짧은 대목인 데다, 보는 이를 압도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보는 이가 마치 병상을 지키는 아들 보쿠(오다기리 조 분) 곁에 나란히 서 있는 듯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기키의 연기는 일관되게 잔잔하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연기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다른 배우들이 배역에 대한 고도의 몰입으로 장애를 ‘실감 나게’ 연기할 때 기키는 자신의 실제 장애를 연기의 일부로 이물감 없이 들여놓는다. 관객으로서 이와 비견할 만한 연기를 본 것은 <초록물고기>에서였다. 당시 무명이었던 송강호의 다소 멋쩍은 듯한 건달 연기를 보며 “진짜 건달을 데려다 연기를 시키다니, 과연 이창동이군” 하고 동행에 귀엣말을 했는데, 몇 달 뒤 <넘버3>를 보고서야 그가 직업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메소드 연기를 ‘극사실주의를 지향하는 연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강렬함이나 화려함마저 걷어낸 이들의 연기야말로 진정한 메소드 연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듯 연기가 아닌 듯 연기하는 것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테크닉의 범주를 넘어선다. 애드리브만 해도 수준 높은 애드리브는 순발력과 무관하다. 박철민은 <목포는 항구다>에서 “나는 세상에서 애드리브하는 놈이 제일 싫어”라고 애드리브를 했는데, 그한테서 “연기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차례 연습을 했노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키는 자신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을 수십 번씩 연습했다고 한다.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키가 그런 노력 끝에 도달한 지점은 배우가 소거되고 배역만 남은 상태, 자기 얼굴 위에 가면을 밀착한 상태는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영화 속 기키의 배역에는 언제나 기키가 있다. 그녀의 연기는 배우와 배역 사이를 타고 흐르는데, 연기라는 돛단배의 아딧줄을 쥔 건 배우 자신이었다.


나이 든 어머니 역을 주로 맡았다고 해서 기키를 일본의 ‘국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그래서 온전하지도, 온당하지도 않다. 그 표현에 국가주의의 낌새가 서려 있어서만은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어머니, 공동체의 어머니는 전형성에 갇혀 입체감 없는 존재로 표상되기에 십상이다. 개별자로서의 어머니는 누구나 삶의 수없는 물굽이를 돌고 돌아 지금 여기를 지나고 있는 서사의 존재이며,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얽힌 욕망의 주체다. 어머니의 진실은 이렇듯 명확하면서도 가시화되기 어렵다. 배우가 연기의 중심을 세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연습을 거치더라도 어머니는 다만 숭고하고 자애롭거나, 반대로 광기나 탐욕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극단화되고 말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2008)

기키의 연기는 단 한 번도 입체감 없이 납작하거나 극단적인 적이 없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기키는 은퇴한 개원의 부인으로 그만그만한 일상을 사는 노인으로 나온다. 교양인을 자처하는 남편과 달리 그녀의 소소한 취미 생활은 빠칭코 출입이다. 30년 전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도 단 한 번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외도 현장 너머로 들려오던 가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애창곡 삼아 부른다. 큰아들이 대신 희생하고 바다에서 구해준 소년을 10년 넘게 큰아들 기일마다 불러 마음 고문을 하는가 하면, 집 안으로 날아든 노랑나비를 큰아들이라 여기는 애틋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칫 분열적으로 재현될 공산이 큰 이런 페르소나가 더없이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기키가 아딧줄을 단단히 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의 부조리가 그렇듯,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는 손톱 밑에 보일 듯 말 듯 박힌 가시만큼만 섬뜩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기키의 장애를 <앙>에서야 뒤늦게 눈치챈 걸까. <앙>에서 기키는 한센장애인으로 나온다. 긴 세월 격리생활을 한 그녀는 사람 앞에서 수줍음을 많이 타면서도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에서도 그녀가 연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채, 그녀의 굽은 손가락처럼 그녀의 빗나가는 눈동자 역시 한센병의 결과로 여겼다. <앙> 이후 출연작에서 나는 다시 그녀의 장애를 의식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장애인 연기를 할 때에만 실제 장애를 인식하고, 비장애인 연기를 할 때에는 소박한 외모의 일부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다. 그녀의 연기가 다른 배역들을 전혀 압도하지 않고 오히려 배경의 일부처럼 보이듯이.


기키는 삼십 대 초반부터 노인 여성 연기를 했다고 한다. 필모그래피가 쌓일수록 분장에 들인 품은 적었을 것이다.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은 그녀 생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직전 작품에서보다 많이 늙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그녀는 생의 마지막 대사를 애드리브로 남겼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동안 가장 사실적인 연기로 소박하지만 소멸하지 않는 희망의 리얼리즘을 보여줘서 고마웠다고 기키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느 가족(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