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20대 남성은 촛불의 배교자인가

 

2016년 서울시가 청년수당에 대한 정부의 직권취소 조치에 항의하는 대형 펼침막을 서울시청 외벽(왼쪽 사진)에, 정부가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외벽에 정부 입장을 알리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김명진 기자 liittleprince@hani.co.kr

류머티즘 앓는 다리를 힘겹게 옮기는 노인의 모습이 내 어릴 적 치성드리고 집에 오던 할머니의 모습과 겹쳤다. 박근혜 탄핵심판 2주년이었던 10일 오후 서울 낙원상가 부근. ‘탄핵 무효’ 집회를 마친 노인들의 표정에서 깊은 신심이 묻어났다.

이튿날 나온 조사 결과에서 자유한국당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처음으로 지지율 30%대를 회복했다. 며칠 뒤 조사에선 내처 2%를 더 끌어올렸다. ‘박근혜 신정체제’는 지금 신성동맹 세력을 거느리고 복위하는 꿈에 빠져들고 있을지 모른다.

반면 지지율 하락으로 자유한국당에 한자릿수로 쫓기게 된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보고서를 다시 꺼내 읽고 있지는 않을까. 20대 남성들을 ‘배교자’로 지목했던 그 보고서 말이다.

보고서도 데이터에서 영적인 감을 얻었을지 모른다. 동반 추락하는 20대 남성의 더불어민주당 지지율과 미투운동 지지율. 두 데이터 사이엔 이렇다 할 논리적 연결고리가 없지만, 보고서는 매직아이에서 형상을 찾아내듯 마침내 다음과 같은 서사를 구성했다.

‘사회적 배려심이 낮은 20대 남성들이 정치세력화된 20대 여성들의 집단이기주의에 반감을 품던 차에 정부와 여당의 친여성 정책 기조를 보고 감정이 폭발해 등을 돌렸다.’

20대 남성에게 퇴마 의식을 하려다 20대 여성을 순장조로 만들어버린 난삽한 희비극 시나리오다. 누구의 시각인가. 후배 세대에 ‘20대 개새끼론’을 펴던 이들은, 비난의 표적이 30대가 된 지금 새로운 20대를 다시 ‘찌질이’로 규정한다. 세상은 이 호명의 주체를 586이라 부른다.

보고서가 주목하지 않은 데이터가 있다. 20대 남성과 50대 남성의 미투운동 지지율 격차(44% 대 72.7%, 한국여성정책연구원)다. 적어도 30년 이상 가부장제에 도전받지 않은 50대 남성이 20대 남성보다 성 인지성이 저만큼 높을 리 없다. 50대인 나도 믿기지 않는다.

50대 남성은 생존을 걸고 20대 여성과 경합하지 않지만 20대 남성은 경합한다는 것 말고도, 데이터가 일러주는 진실은 더 있다. 50대 남성은 과묵과 에둘러 말하기를 미덕으로 배웠지만 20대 남성은 직설화법에 익숙하다. 586 남성은 ‘정치적 올바름’의 기술을 연마했지만 20대 남성은 그렇지 않다.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는 ‘촛불 광장’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갈등을 회피하는 기술”로 쓰이지 않았는지 묻는다.(<무명의 말들>) 소수자를 보호한다며 소수자를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 고정시키는 권력의 통치술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촛불 광장은 ‘박근혜 퇴진’을 빼면 공통보다 차이가 훨씬 넓은 장소였다. 여성과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이 논란이 됐지만 갈등이 전면화하진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이 제어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 촛불 광장은 단일성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예배당처럼 신성화될 수밖에 없다. 차이는 배려될 수 있으나 주체화되면 안 된다.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조차 모르는 20대 남성의 실존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20대 남성들의 반격에 “이런 애들이었어?” 해봐야 소용없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봉합된 우정보다는 차라리 전적인 적의를!”이라고 했다.(<즐거운 지식>) 백래시에는 단호해야 하지만, 갈등 자체를 백안시하면 안 된다. 20대가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우리 사회에 내놓을 자신의 요구를 찾아낼 수 있게 하는 정치적 기획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먼저 촛불의 신성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박근혜 신성동맹에 맞서는 길이기도 하다.

※ <한겨레> 2019년 3월15일치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85963.html

 

[아침 햇발] 20대 남성은 촛불의 배교자인가/ 안영춘

안영춘논설위원 류머티즘 앓는 다리를 힘겹게 옮기는 노인의 모습이 내 어릴 적 치성드리고 집에 오던 할머니의 모습과...

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