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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노동자를 위한 정년 연장은 없다

“정년이 예순다섯살로 늘면 폐지 줍는 노인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생산직 노동자인 동갑내기에게 소주를 따르며 객쩍은 질문을 던졌다. 육체 노동자의 ‘가동연한’을 65살로 늘린 대법원 판례가 나온 날 밤이었다. 기계에나 붙일 법한 표현(가동연한)에서 평생 맡아온 쇳내가 느껴지기라도 한 걸까. 그가 소주를 단숨에 털어넣더니 선술집 낮은 천장에 대고 중얼거렸다. “정년이 늘어도 난 예순까지만 다니고 관둘 거네. 폐지를 줍든 말든 그건 다음 문제고.”

 

물론 그가 훗날 폐지를 주울 가능성은 희박하다. 제 돈 털어가며 노동운동하느라 손에 쥔 건 별로 없지만, 나름 연봉 괜찮은 사업장에 7~8년 더 다닐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기간만큼을 “다만 견딜 것”이라 했다. 배부른 소리라 해도 하는 수 없다. 젊음을 다 바친 민주노조가 악명 높은 ‘창조컨설팅’의 공작에 무너지는 걸 지켜봐야 했던 그는, 또박또박 나오는 월급에서도 모욕을 느낀다.

 

폐지 줍는 노인.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번 대법 판결로 정년 연장 논의가 본격화할 거라 한다. 아찔한 초고령화 속도를 생각하면 ‘65살 정년 시대’가 먼 얘기 같진 않다. 쥐꼬리만한 국민연금이라도 받으려고 몇년 보릿고개를 각오하는 이들 대부분은 5년 더 일할 기회에 반색할 것이다. 2017년 법정 정년이 60살로 늘었을 때도 국가의 시혜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과연 그럴 일인가.

2010년 프랑스 사례는 우리 관념으로 보면 배은망덕이다. 정부가 정년 2년 연장에 나서자 철도, 항공 할 것 없이 모든 분야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나섰다. 청년들도 지금의 ‘노란 조끼’ 저리 가라 할 기세로 시위를 벌였다. 한쪽은 연금 수령 시점이 늦어지는 데, 다른 한쪽은 미래 일자리가 줄어드는 데 반발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정년 연장은 전 지구적인 고령화와 연금 재정 압박이 빚은 연금술이다. “덜 받기 위해 더 일하라”는 지상명령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노동자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핵심은 돈이 아니라 강제된 노동 연장이었다. 연금을 받는다는 건 한나 아렌트가 제시했던, 소외의 ‘노동’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을 위한 ‘행위’가 가능한 생애주기로 넘어가는 걸 뜻한다. 정년 연장은 그 시기를 늦춘다.

 

연금으로 크루즈 여행을 꿈꾸는 저들과 최저생계 이하의 삶을 꾸리기도 벅찬 우리를 단순비교하는 건 무리다. 그렇더라도 ‘개미와 베짱이’ 우화나 떠올려서는 안 된다. 우리 생애주기가 ‘행위’의 기회와 스쳐보지도 못한 채 끝나버릴 가능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정년 연장이 맥거핀은 아닌지도 의심해봐야 한다. 정작 우리 사회는 오래 일하고 싶어도 오래 일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조기 퇴직금 털고 대출까지 받아 치킨집, 편의점 차렸다가 신용불량자 되는 악무한은 이 시대의 압도적인 풍경이다. 홍기탁과 박준호는 고용 합의 하나 지켜내려고 75m 굴뚝 위에서 426일을 버텨야 했다. 인공지능이 사람 일자리를 앗아간다는 시대에 비정규직 김용균은 홀로 문제투성이 컨베이어벨트를 돌보다 스물넷에 세상을 떴다. 이들 누구도 정년 언저리에 가보지 못했다.

 

한국 초고령화 문제의 본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의 노인빈곤율이다. 가난한 노인의 대부분은 젊어서부터 가난했다. 일하다가 죽지 않은 이들은 모두 노인이 되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국가가 정년을 연장하지 않아도 죽기 전까지 일한다, 폐지를 줍든 안 줍든. 노인이 불행한 사회는 노동이 대접받고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의 이면이다.

 

노동하는 내 친구가 예순 넘어 멋진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되기를 곡진하게 바란다.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렸습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84046.html

 

[아침 햇발] 노동자를 위한 정년 연장은 없다/ 안영춘

안영춘논설위원 “정년이 예순다섯살로 늘면 폐지 줍는 노인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생산직 노동자인 동갑내기에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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