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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엽기적 개인은 왜 ‘탄생’하나

3차 저축은행 퇴출 사태는 지금 몇 문장짜리 가십 기사로 재현되고 있다. 저축은행 회장이라는 자가 고객 돈을 빼돌려 야밤에 밀항을 하려다 붙잡혔는데, 알고 보니 중졸 학력인 그는 젊어서 서울대 법대 출신 행세를 하며 가짜 졸업장으로 대기업에 입사를 했는가 하면, 나이 들어서는 신용불량자이면서도 저축은행 대주주 노릇까지 했다는 것이다. 신문과 방송들은 이 기인의 엽기적 일대기를 알리는 데만 몰입하고 있다.

비슷한 예는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12월, 서브프라임 사태를 겪던 미국에서 나스닥증권거래소 회장 출신인 버나드 메이도프의 다단계 금융(폰지) 사기 사건이 터졌다. 피해액만 무려 650억 달러였다. 미국 언론들은 이 번듯해 보이는 금융가의 엽기적 사기 행각을 보도하기에 바빴다. 메이도프의 아들은 자살을 했고, 메이도프에게는 생물학적으로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150년형이 선고되었다. 한국의 회장도 엄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바로잡히는 것은 아니다. 개가 사람을 물면 보도를 안 하고 사람이 개를 물어야 보도를 하는 게 언론의 본성이라지만, 그리하여 서브프라임 사태도, 저축은행 퇴출 사태도 개인 윤리 문제로 치환되었다.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인이었던 미국 투자은행들의 부실채권 ‘증권화’나 한국 저축은행들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모두 합법과 불법의 경계 위에서 펼쳐지는 머니게임이다.

타락한 개인은 병든 체제의 자식이다. 체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악인은 ‘탄생’된다. 그렇게 탄생한 개인이 공공의 적이 됨으로써 위기의 체제는 구원받는다. 이를테면 어느 누구도 이 합법적 도박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현 정권의 실세 차관이 부동산 인허가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사건의 구조적 연관성은 짚어지지 않는다. 개인의 범죄를 비난하는 지면 안쪽에는 오늘도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온갖 투자 정보가 넘쳐난다.

분노라는 상품에 이은 아이템은 적당한 눈물이다. 분노와 눈물의 이어달리기는 저널리즘의 공식이다. 머잖아 저축은행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줄사탕처럼 보도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피해도 개인화되기는 마찬가지다. 피해자들은 악마 같은 개인에게 잘못 걸려든 무구한 개인들일 뿐이다. 악마가 체제를 위해 탄생하듯이 피해자도 체제를 위해 전시된다. 반대로, 체제 안정에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불리한 경우 피해자는 철저히 비가시화된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이후 노동자와 가족 22명이 숨지고, 지난 6년 동안 케이티(KT) 재직·퇴직 노동자 204명이 숨졌지만, 언론에게 이들은 투명인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