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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된 글

그 버스의 행선지는 ‘희망’이다

* 이 글은 6월 12~13일 1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다녀온 뒤에 썼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7월 9일 발행)에 실렸습니다. 7월호가 발행되던 날, 다시 1박2일 일정으로 2차 희망의 버스를 탔습니다. 

부산 영도 일대의 스카이라인을 그리는 일은 이곳 부둣가를 따라 빽빽이 들어선 타워크레인들의 꼭짓점을 잇는 일이다. 멀리 지나치며 볼 때, 그 괴이한 철골 구조물들은 땅에 버티고 선 게 아니라 스카이라인에 주렁주렁 매달린 듯 보인다. 시인 기형도풍(‘안개’·1985)으로 말하면, 타워크레인은 이 도시의 ‘성역’이자 ‘명물’이다. 이곳에 처음 온 이들은 누구나 얼마 동안은 경계심을 늦추는 법 없이 낯선 크레인의 숲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라, 사람들은 쉽게 크레인과 식구가 되어, 그 사이를 흘러다닌다. 크레인은 자주 짙은 해무에 갇힌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1937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다. 그곳에 선 지 30년도 더 된 85호 크레인 역시 이 일대 거대한 크레인 숲에서는 그저 한 그루의 고목나무인 셈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습관은 그곳에 이르러 별안간 낯섦과 마주한다. 그 많은 크레인들 역시 85호로 인해 쇠붙이가 아닌 산 나무가 된다. 85호의 지상 35m 지점에는 둥지 하나가 있다. 그곳이 특별한 것은 둥지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파랑새 때문이다. 그 새의 이름은 ‘김진숙’이다. 흔한 이름이다. 아니, 흔한 건 이름뿐이다. 그 이름에서 파생한 모든 현상은 낯설다. 특별하고 고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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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 이강혁

그녀가 둥지를 튼 지 157일에서 158일째로 넘어가던 지난 6월 12일 꼭두새벽, 85호 크레인 아래에 사람들이 모였다.(1) 서울에서, 수원과 평택에서, 전주와 군산에서, 광주와 순천에서 버스를 타고 온 이들은 족히 750명을 넘었다. 버스의 이름은 ‘희망의 버스’였다. ‘희망’이라는 말은 묘해서, 뜻은 더없이 밝고 환하지만, 그 말이 딛고 선 현실은 정작 잿빛임을 스스로 방증한다. 희망은 ‘비현실’과 ‘유예된 현실’ 사이에서 유동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발화하는 순간, 유예된 현실 쪽으로 다가서려는 의지의 정향이 작동하고, 마침내 이렇듯 긴 버스의 대열을 이루기도 한다.

일부 언론은 85호 크레인 아래 모인 이들이 ‘노동단체’ 사람들이라 했지만, 물색없는 소리다. 서울발 1호차 내부만 들여다봐도 훤한 사실이다. 파업 1300일을 넘긴 유명자 재능교육 지부장 등 두엇 말고, 버스에 오른 45명 가운데 노동단체 사람은 없었다. 1987년 고문사한 대학생 박종철의 아버지, 1991년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아버지에게 소속은 없다. 사회활동 이력이라곤 자원봉사뿐인 주부와 복학을 앞둔 대학생은 동행조차 없었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온 노을이는 초면에 대뜸 고양시 육상대회에서 3등 한 것부터 자랑하는 12살 소녀다. 노을이의 소속은 초등학교다.

민주노총 행사 같은 곳에서 보던 일사불란함이 있을 리 없다. 애초 그것은 번개모임이었다. 참가자들에게는 좌석 번호는커녕 버스 호수조차 배정되지 않았다. 삼삼오오, 또는 짝으로, 더러는 홀로 버스에 올랐다. 그들을 아우르는 공통점은 자발적으로 정해진 계좌에 참가비를 입금했다는 사실뿐이지만, 그것은 또한 공통의 정향을 품은 입금이었다. 버스 안에서 처음 얼굴을 대하는 이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흡사 고해(告解)를 하는 듯했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꿈, 그리고 부채 의식을 누구나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마치 현실과 꿈과 부채 의식이 ‘희망의 번개’를 방전하는 3대 요소 같아 보였다.

크든 작든, 각자의 현실은 ‘불안’과 동거하고 있었다. 누구는 현재의 비정규직이고, 다른 누구는 미래의 비정규직이었다. 서울 강남의 최고 부자동네에서 학원강사를 한다는 한 여성은 이날 “잘릴 각오를 하고” 한진중공업 사태를 주제 삼아 수업한 뒤 버스에 올랐다고 했다. 유명자 지부장, 그녀는 1300일 넘게 일을 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버텨왔다. 각자의 꿈은 1인분을 겨우 감당하는 소박한 것들이었고, 크다고 해봐야 그 1인분의 꿈들이 함께 평화롭게 기대고 조화하는 것이었다. 노을이는 동물학자가 꿈이었다. 유명자 지부장은 학습지 노동자도 노동자로 인정받아 다시 일하고 싶다는 빤한 꿈을 가슴에 사무치게 품고 있었다. 가까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닿기 어려운 이 시대의 꿈이었다.

세 가지 중 마지막 하나, 부채 의식은 김진숙의 고행을 바라보는 가슴앓이였다. 또한 그것은 불안이 습관이 되고, 꿈을 환기하는 일이 외려 낯설어진 일상을 뒤흔든 그녀에 대한, 말 그대로 채무자의 감정이기도 했다. 김진숙은 크레인 위에서 단단히 버티며, 자신이 둥지를 튼 크레인의 해발고도와 깔고 앉은 평수, 쇠붙이로 이루어진 공간의 낯섦을 통해 하루하루가 고단하다는 이들로 하여금 개별적 고단함의 가벼움을 돌아보게 했다. 습관이 된 일상은, 안개를 걷어내듯 그녀가 들춰낸 현실과의 아득한 거리감 앞에서 흔들렸다. 김진숙이 그 낯섦의 장치로 그들 가슴에 격발한 것은 다름 아닌 ‘희망’이었고, 그들은 가슴속 채권에 셈을 치르지 못해 안절부절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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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크레인 아래, 얼기설기 무대가 세워졌다. 무대 위로 불려나온 이들은 누구나 신문 지면에 얼마간, 물론 예외 없이 예능 프로그램 후일담보다는 드물고 짧았지만, 이름이나 사연이 오른 적이 있었다. 1895일간 파업하며 “죽는 것 빼고는 다 해봤다”는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은 행사 진행팀 ‘깔깔깔’의 표식인 고깔모자를 썼다. 스머프 같았다. 그녀가 스머프라니…. 쌍용자동차 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콜트·콜텍 노조, 발레오공조 노조 소속 노동자들…. 호명된 이름들은 제가끔 고유하면서도 하나의 이름으로 들렸는데, 그것은 그 이름들이 뚫고 와야 했던 현실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일단 시작하면 최소 몇백 일은 각오해야 하고, 노숙농성, 옥쇄파업, 단식, 용역과 경찰의 폭력, 구속 그리고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을 정해진 수순처럼 감당해야 하는 이 시대조건 속에서 감히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파업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름은 하나였다. 또한 온몸을, 제 삶 전체를 울림통 삼아 외쳐도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 목소리가 국가경제 담론에 파묻혀 타자화됐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름은 따로따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현실이 몇 가지 사소한 사건으로, 개인적 불행으로 치부되지 않고, 구분되지 않는 이름으로, 동일한 사건으로 ‘각인’되면서 새로운 전환이 예비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85호 크레인 아래는 그 ‘전환’의 징후가 재현되는 자리 같았다. 무대 위로 호명된 이들의 사례 하나하나는 앞선 사례의 단순반복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모두 한자리에서 증언됨으로써, 그것들은 사소한 개인적 불행이 아닌 구조적 동일성 위의 참극으로 인지됐다. 또한 개별 사건들의 단순반복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의 유의미한 서사적 통합체를 형성해가는 정향의 징후로 포착됐다. ‘기륭전자 김소연의 1895일과 작은 승리(2)가 없었다면 김진숙의 158일은 어땠을까’라는 물음은 ‘박창수·김주익·곽재규의 죽음(3)이 없었다면 김진숙의 오늘은 어땠을까’라는 물음만큼의 중력으로 당겨졌다. 그것들은 모두 얽혀 떼어낼 수 없고, 표고차는 작지만 모두 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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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의 출현은 확연한 하나의 사건이다. 그들은 ‘희망의 버스’의 문선대(문화선전대)였다. 그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인 첫새벽부터 무대를 장악해,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쩌렁쩌렁 노래를 이어갔다. ‘희망의 버스’가 낯선 양식이었다면, 날라리 외부세력은 새로운 차원의 도래로 비쳤다. “진숙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 조건 무조건이야~.”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뽕짝’을 개사해 부르기 시작했고, “사.랑.해.요.김.진.숙.우.윳.빛.깔.김.진.숙”을 선창했다. 85호 크레인 아래의 사람들은 밤새 울고 웃으며 노래에 맞춰 춤을 췄고, 구호를 외쳤다. 그때마다 김진숙은 손을 흔들었고, 아래에서도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35m 높이의 크레인 난간에서 연설을 시작한 김진숙의 목소리는 수없는 망치질과 담금질로 단련된 금속성의 울림이었다. 그런 그녀도 날이 밝도록 그 높은 곳에서 춤을 추었다. 2010년 1월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천막 단식농성을 하면서 따뜻한 콩국 한 그릇이 너무나 먹고 싶다던(4) 그녀라면, 85호 크레인에서 뜻을 이루고 내려온 뒤 비트 강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싶어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보이 김진숙! 혼자 생각하다, 홀로 민망해했다. 그래도 분명한 건 김진숙 역시 철없는 날라리들로부터 큰 힘을 얻고 있었고, 그들이 발행한 ‘희망’의 채권을 취득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들과의 만남을 낯설어하면서도, 그들을 ‘천사’라고 불렀다.(5)

가장 자본주의적 얼굴을 지닌 대중문화 팬덤 현상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가락과 춤사위를 통해 아침을 여는 풍경은 부둣가의 푸른 이내만큼이나 징후적이었다. 85호 크레인 위의 한 사람과 그 아래 750여 사람을 ‘시대정신’ 같은 근엄한 교집합으로 묶는 건 억지스럽고 시대착오적이다. 김진숙과 날라리들 사이에서 시공간적 동질성을 찾는다는 건 무색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주권에서 추방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이고, 바우만의 잉여인간이자 랑시에르의 몫이 없는 자들인지도 모른다.(6) 그들에게는 치안적 통치 양식에 대항하는 구성주의적 저항과 민주주의의 실질과 다중의 자기지배 역량을 고양하려는 절대민주주의의 요구가 강하다.(7) 그리고 그들은 놀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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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채길용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파업을 접기로 사 쪽과 합의한 뒤, 법원은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조선소 밖으로 끌어냈다. 사법권력은 법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패대기치기 위해 회사가 돈을 주고 사병으로 부리는 용역들의 힘에 기댐으로써, 정치와 자본이 결탁한 지배 방식을 외설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35m 둥지에는 아직 김진숙이 있고, 크레인 중단부에는 8명의 노동자가 버티고 있다. 행정대집행 뒤 한진 자본이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85호 크레인의 전기를 끊은 것이었다. 그들 역시 소셜 네트워크의 힘을 눈치챘는지는 모르나, 그것을 전기회로의 일부쯤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했음은 분명하다.(8)

조선소 안과 밖은 무수히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희망의 채권자이자 동시에 채무자로서 서로 개입하고 있다. 아무리 큰 힘과 긴 시간을 들이더라도 2차원의 물리력으로는 그 복잡한 고리를 온전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다. 각자의 현실이 불안할수록, 그들은 체제가 낳은 우점종,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가 되어 다시 더욱 긴 ‘희망의 버스’ 행렬을 이루며 성지순례에 나설 것이다. 85호 크레인은 희망의 성역이고, 그곳에 둥지를 튼 파랑새는 세상의 명물이다. 그 서식지는 일시적으로 파괴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85호 크레인과 파랑새는 이미 도처에 편재하기 때문이다. 애초 버스의 행선지는 ‘희망’이었다.

글·안영춘

*이 글은 2011년 7월 4일 새벽에 탈고되었다. 2차 ‘희망의 버스’는 7월 9일 출발한다.

<각주>
(1)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170명의 정리해고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며, 7월 4일 현재 181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2) 송경동, ‘사람이길 포기 못해 하루씩 쌓은 기륭 1895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0년 12월호 참조.
(3)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1990년 5월 전노협 탈퇴를 거부하다 구속된 뒤 의문사했다. 김주익 지회장은 2003년 650명의 명예퇴직에 반대하며 85호 크레인에서 129일간 농성을 벌이다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곽재규 노동자는 13일 뒤 제4도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4) 김진숙, ‘콩국 한 그릇’, 2010년 1월 18일.
(5) 김진숙, ‘바다를 찾아온 육지의 사람’, <한겨레21> 864호, 2011년 6월 13일.
(6)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289쪽, 갈무리, 2011년 참조.
(7) 이명원, ‘인지자본주의라는 양날의 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5월호 인용.
(8) 김진숙은 고공농성을 벌이며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팔로워들과 소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