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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된 글

언론의 자유에 침을 뱉어라

한 달 반 만에 새로 올린 글, 그마저 블로그를 위한 글은 아니었습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월호에 쓴 글입니다. 먼지를 툭툭 털며, 포스팅합니다.


<브레이브 하트>(1995)에서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의 마지막 대사 “프리덤”은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구성한다. 영국 왕의 압제에 맞서 싸우다 최후를 맞는 이의 미학적 비장함은 단연 압권이다. 그러나 맥락은 스타카토처럼 튄다. 13세기,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을 이끌던 이의 마지막 발화가 과연 ‘자유’였을까.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투사가 비운의 죽음을 맞는 순간 했던 말은 ‘자유’가 아니라 ‘대한독립 만세’였을 것이다. 또, 백인들의 잔인한 도륙 앞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이 ‘자유’를 외쳤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설령 월레스가 ‘자유’라고 외쳤다 해도, 그것은 ‘프리덤’(불간섭)이 아니라 ‘리버티’(해방)여야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왜 굳이 ‘프리덤’이라고 했을까?

왜 그들은 주어를 은폐할까?

2007년 10월, 한국 사회는 ‘언론의 자유’ 논란에 휩싸였다. 임기 초재기에 들어간 노무현 정권이 부처별 기자실을 없앤 뒤 통합 브리핑룸을 신설했다. 정부는 이 조처를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라고 이름 붙였다. 거의 모든 언론이 들고일어났다. ‘기자실 대못질… 국민 알 권리 발길질’, ‘언론 자유의 조종이 울린 날’….(1) 비감한 수사(修辭)들이 지면을 장식했다. 기자들이 종이상자 위에 컴퓨터를 올려놓고 복도 바닥에 쪼그려 앉아 기사를 쓰는 모습의 ‘출근 투쟁’ 사진도 실렸다. 풍경의 압권이었다. 그러나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냐, 언론 자유에 대한 대못질이냐?’, ‘기자실 폐쇄냐, 통합 브리핑룸 신설이냐?’라는 가치 평가의 대립을 두고, 지면 어디에도 이런 물음은 등장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겉보기에 <브레이브 하트>의 ‘프리덤’과 한국 언론들의 ‘언론 자유’ 사이에는 이렇다 할 유사점이 없다. 하지만 둘은 자유-자유주의-민주주의의 복잡한 함수관계 안에서 위상적 상동성이 뚜렷하다. 우선 자신 앞에 현시된 사태를 ‘자유’(프리덤) 차원으로만 환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에겐 독립투쟁이, 기자실 통(폐)합이, 전적으로 자유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오로지 자유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더구나 이 둘은 그 자유가 누구의 자유, 누구를 위한 자유인지 지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유를 위한 자유’ 혹은 ‘만인을 위한 자유’란 말인데, 과연 그럴까? 어느 누군가의, 어느 누군가를 위한 자유는 아닐까? 그 누구는 누구일까?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 정치학 교수인 웬디 브라운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라고 했다.(2) 이 책은 세계적 석학들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의 물음에 내놓은 도저한 답이지만, 그녀의 명제는 주어를 ‘자유’로 바꿔도 전혀 손색없다. “자유는 텅 빈 기표다.” 이는 전치도 모방도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는 서로가 서로를 통해 기의를 완성하는 기표다. 이름하여 ‘자유민주주의’. 이 결합에서 ‘자유’는 ‘자유주의’의 축약어다. 자유주의를 자유라고 줄여 부를 때 자유주의는 절대가치로 신성화되고, 마침내 민주주의와 이음동의어가 된다. 적어도 근대 서구적 관점에서는 그렇다.

웬디 브라운의 명제 앞에서, 적잖은 한국 사람들이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떠올릴 것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의 각을 뜸으로써 ‘민주주의’와 ‘반공’을 동의어로 만들었지만, 그 반공의 명분은 뜬금없다. 반공으로 자유 진공 상태를 만든 장본인이 반공으로 다시 그 자유를 애써 수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둘러싼 이런 비논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유(주의)는 바로 그 역설 위에서 보편성을 구축한다. ‘프리덤 하우스’로 상징되는 미국의 자유주의는 ‘미국·백인·남성’의 자유를 만인의 자유로 표상한다. 그 자유의 이름으로 남미와 아프리카를 피로 물들이며, 전 지구적인 자유 부재 상태를 유지해오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수없이 고발하는 바대로다.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된 자유주의

그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고발하는 것은 ‘자유의 타락’인가? 자유(민주)주의의 기원과 역사를 보면, 적어도 자유주의에서 ‘타락’이라는 동태를 포착할 수는 없다. 근대성이 말하는 자유란 인민들 사이의 계약에 의한 자기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입법 주체(‘누가 인민인가?’)의 문제였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무한한 정보력과 오류를 범할 수 없는 탁월한 판단 이성을 가진 주체를 전제한다. 그런 주체만이 일반의지 실현을 위한 자유의 권리를 갖는다. 문제는 ‘누가 자유권을 수행할 수 있는가’로 치환된다. 답은 ‘남성 부르주아지’였다. 자유권은 처음부터 특권과 배제의 권리였던 셈이다. 이런 주체가 지닌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얼굴은 근대 전체에 걸쳐 민주주의의 위계질서, 배제, (타자를) 예속하기 위한 폭력을 영속화했다. 따라서 그 핵심에는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비자유가 존재한다.”(3)

자유는 본디 경합의 가치다. 흔히 자유는 평등과 경합한다고 여기지만, 자유가 경합하는 건 정작 자유 자신이다. 만인의 보편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내 자유와 타자의 자유가 만나는 곳에서 자유의 경계가 그어져야 한다. 공리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는 자유의 한계를 긋는 규범론이(어야 한)다.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내 자유는 타자에게 억압이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한다. 현실은 언제나 후자였다. 자유주의 체제 아래서는 힘의 우열이 자유권의 처소를 가른다. 그럴수록 자유주의는 물신화하고 ‘누구의 자유,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라는 물음은 은폐된다. 영화 속 월레스는 주어가 없는 ‘프리덤’을 외치고, 한국 언론들도 주어가 없는 ‘언론 자유’를 외친다. 그러나 주어가 은폐되는 만큼 폭로도 예비된다.

기자들은 왜 기자실 문제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그들이 기자실이라는 공간의 재배치 문제를 언론 자유의 본질적 심급으로 끌어올리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보편적 가치로서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는 방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직후 벌어진 기자실 논란 사태는 6년 뒤 통합 브리핑룸 사태와 정확히 대비된다. 그해 3월, 신생 온라인 매체였던 <오마이뉴스>의 기자가 인천공항 기자실에 들어가려다 물리력으로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오마이뉴스>는 이 ‘사소한’ 사건을 크게 보도했고, 기자실을 둘러싼 일대 논란이 벌어졌다.(4) 그러나 주류 언론은 당시 ‘침묵’이라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말하지 않을 자유권’을 행사해 의제를 블랙홀로 빨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기자실이라는 공간은 철저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 기자라고 해서 누구나 기자단에 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자실을 드나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00년대를 전후해 주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신생 매체가 크게 늘었지만, 그 많은 매체들에는 한동안 부처 브리핑 청취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시절, 일부 기관에 이들 매체만 따로 드나드는 ‘제2기자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구 대의민주주의에서 상·하원이 등장한 역사에 견줘 언론 자유의 신장이라고 볼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오히려 중세 유럽의 게토 탄생 과정과 무척 흡사하지 않은가. 이처럼 언론 자유는 공간의 정치학과 마주한다. 공간의 위계가 강하게 작동하는 건 특정 공간이 특정한 권력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자실이라는 공간 문제는 ‘특권적’ 언론 자유의 본질적 심급을 이룬다.

1991년 장 보드리야르는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명제로 전쟁 수행 권력과 언론의 공모에 의해 탄생한 ‘시뮬라크르’(Simulacre)를 갈파했다. 미군의 폭격과 이라크 민간인들의 폭사라는 번연한 사실들이 전자오락 이미지로만 유통된 현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통찰에서 비약의 느낌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우스개로, 그가 한국의 기자실을 들여다봤다면 훨씬 핍진한 명제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한국 법원의 일요일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한국의 언론 보도를 보면 법원은 매주 일요일에도 판결문을 내놓는다. 기자단이 주중 판결문의 날짜를 일요일로 바꿔 보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는 법원의 희화적 시뮬라크르는 기자실이라는 밀폐 공간에서 일어난 플라스마 현상인 셈이다.

기자실, 그 공간의 정치학

‘기록되는 순간’, 탁기형-2010

    

법원 기자단의 이런 행위를 엠바고(보도유예)라고 한다. 엠바고가 성립하는 사정은 다양하고, 더러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법원 판결문 보도에서처럼 기자단의 필요(기삿거리가 없는 일요일을 대비한 비축)에 의한 경우가 가장 많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정권의 필요와 요구에 의한 경우가 크게 늘었다. 엠바고라는 표현이 몇 년 새 언중에게 익숙해진 까닭도 거기에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방미 때 타결된 쇠고기 협상은 당일 보도되지 않았다.(5) 지난 1월 소말리아 해적을 상대로 치른 군사작전도 납치된 인질들의 안위를 위해 엠바고가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지만, 대통령이 방송 카메라 앞에서 가장 먼저 ‘전공’을 발표할 수 있게 하려는 정부 쪽의 치열한 수싸움 성격이 강했다.(6)

어느 경우든 엠바고에는 몇 가지 고유한 속성이 있다. 첫째, 기자단이라는 주체가 없으면 엠바고도 없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건 엠바고가, 그리고 기자단이 카르텔 자체라는 방증이다. 둘째, 카르텔은 ‘사실’(Fact) 차원의 문제다. 출입처와 기자단 사이에 맺은 약속이 사실의 발생 시점, 심지어 사실의 존재 여부까지 자의적으로 규정한다. 셋째, 다른 출입처 기자단에게까지 기속력을 갖는다. 엠바고 카르텔은 2차원의 사슬고리가 아니라 거대한 중첩 구조를 띠는 것이다. 넷째, 엠바고는 카르텔에 동참하지 않은 언론의 취재 권리 전반까지 규율한다. 국방부 기자단에 들지 않은 3개 매체가 소말리아 해적 1차 군사작전 실패를 보도하자, 정부가 38개 기관 출입을 금지하고 보도자료 제공을 중단시킨 경우가 그렇다.(7)

마지막 네 번째 속성은 엠바고가 권력의 이해를 대변하고 관철하는 지렛대가 되기도 하는 현실을 방증한다. 그렇더라도 언론이 동정을 살 이유는 하등 없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웬만큼 정착한 체제라면 엠바고는 언론의 (필요에 의한) 동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방이 언제나 이익을 보고 상대방이 언제나 손해를 보는 ‘거래’란 없는 법이며, 손해 또한 거래관계에서는 전략적 선택 가운데 하나다. 루소의 일반의지가 만인을 모집단으로 설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해보라. 사회계약론자들이 구상한 ‘계약을 통한 국가’는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대의제가 목표였다.(8) 사실, 언론 자유도 엠바고(계약)를 통한 기자단(대의기구)의 자유로 파악하지 못할 이유는 없고, 이를 위해 언론도 최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주어 없는 자유’ 못지않게 익숙하면서도 좀처럼 따져 묻지 않는 것이 또 있다. 언론 자유는 어쩌다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가 되었는가 하는 ‘불경한’ 물음이다. 언론 자유를 신성불가침한 가치로 승화한 인물을 꼽으라면 존 밀턴과 존 스튜어트 밀을 들 수 있다. 밀턴은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사상의 공개시장’, ‘자동조정의 원리’ 등의 개념을 주창했다.(9) 요약하면, 진리와 거짓이 자유롭고 개방된 대결을 펼치면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밀턴의 개념을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가, 단 한 사람의 의견에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수의 의견이 진리라면 발언의 기회를 억압함으로써 진리를 확인할 기회를 잃는 것이요, 설령 거짓이라 해도 진리를 거짓과 더욱 명확히 대비해 고양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10)

그러나 밀에게 소수 의견을 가진 자는 오늘날 소수자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이 자유주의 사상가는 기존의 다수 지배를 의미하는 1인1표제의 민주주의는 잘못된 민주주의로서, 소수 지성인의 견해가 경청되는 민주주의만이 바람직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11) 또, 하층 계급의 야만성과 무지를 경계하면서 “너무 낮은 수준의 정치적 지성과 계급입법이라는 이중의 위험이 매우 위험스러울 정도로 존재한다. 이런 해악을 제거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존재하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했다. 그의 처방은 대의제와 관료제였다.(12) 밀의 화법을 빌리면, 소수의 기자단이 대의적 권리를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언론 자유를 수호하는 길이다.

소수의 특권을 위한 언론 자유

밀턴과 밀이 나름의 계급적 속내로 언론 자유와 관련한 입론을 폈다면, 이를 제도로 성문화한 것은 미국의 수정 헌법 제1조(일명 권리장전·1791년)였다. “의회는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헌법에 못박은 것이다(연대기적으로는 수정 헌법 1조 제정이 밀의 <자유론> 발간보다 앞선다). 그런데도 미국이 오늘날 ‘언론 자유의 천국’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수정 헌법 1조를 제정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뜻을 제대로 떠받들지 못한 후손 탓만은 아니다.(13)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언론을 각별히 ‘제4부’라고 부른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4)

미국은 최초로 헌법에 삼권분립을 명시한 나라이자, 연방제의 나라다. 민주주의 요체로서 권력의 분산을 내세운 것이지만, 그 이면의 의도는 “과도한 한 인물, 또는 한 세력이 많은 인민의 지지를 업고 등장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15) 미국이 대통령을 유권자 총득표 수로 뽑지 않고 각 주별로 동일한 인물을 지지하는 것으로 계산해 뽑는 희한한 간접선거제를 채택한 것을 보면 그 동기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16) 건국 당시 만들어진 이 제도들은 하나같이 패권세력 내부의 정치공학적 산물이다. 미국의 수도가 최대 도시 뉴욕에서 허허벌판의 워싱턴으로 옮겨간 것도 남부와 북부, 연방주의와 공화주의 패권세력이 타협한 결과였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은 “어떤 정부도 감시자가 없으면 안 된다”며 “신문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 정부는 항상 감시자를 갖게 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자칭 타칭 ‘감시자’로서 언론의 위상은 삼권의 ‘외부’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의 패권 대결 속에서 한쪽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그야말로 ‘내부’의 제4권력이었다는 점에서 만인의 자유와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다. 공화주의자였던 제퍼슨이 대통령 재임 중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이 오직 신문만 읽는 사람보다 교육이 더 잘돼 있다”며, 자신을 공격하는 신문들에 넌더리를 냈다는 일화는 의미심장하다.

미국 수정 헌법 1조에서 표방하는 언론 자유가 만인의 발언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최근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위키리크스 사태에 대한 미국 권력자들의 발언은 이 나라가 과연 수정 헌법 1조의 나라인지 의심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논리는 있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차관보는 위키리크스가 수정 헌법 1조의 보호를 받는 언론기관이 아니라며,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를 은닉자, 간첩, 더 나아가 테러리스트로 처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7) 그러나 언론의 범주에 대한 이런 협애한 규정은 자가당착적이다. 선출되거나 임명되지 않은 민간 기업(기자들이 내미는 신분증은 기업의 사원증이다)에 대해 어떤 기준을 적용해 법률기구적 위상을 부여할지 말지를 정한다는 말인가.

미국에 수정 헌법 1조가 있다면 한국에는 헌법 제21조가 있다. ‘표현의 자유’ 조항으로 불리는 21조는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상동적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1항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양쪽의 권리는 배중률(排中律)의 관계에 놓인다. 둘 다 긍정하거나 둘 다 부정할 수 있을 뿐, 어느 한쪽만 긍정하고 다른 한쪽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헌법의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를 구가하는 한국의 주류 언론은 집회·결사의 자유를 신봉하고 수호하는 데 앞장서는 게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옳다. 하지만 종이 먼지 풀풀 날리는 묵은 신문에서부터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최근 신문까지 뒤적여봐도, 현실은 ‘아니다’이다.

‘제4부’는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자

지난해, 필자는 근대 언론 태동기의 가장 큰 집회·시위였던 1919년 3·1운동 때부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까지 모두 7건의 초대형 집회·시위 사태에 대한 신문 보도를 통시적으로 분석했다.(18) 1919년 3월 8일자 <매일신보>(19)에 실린 이완용 후작의 ‘황당한 유언(流言)에 미혹지 말라’와 2008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사설 ‘반미 반이로 몰고 가는 ‘광우병 괴담’ 촛불시위’에서 나타나는 집회·시위에 관한 두 신문의 인식에는, 90년의 시차가 무색하게도, 아무 차이가 없었다. 두 글은 대중의 무지와 이를 악용하려는 세력의 선동, 이런 선동에 따른 대중의 부화뇌동 결과로 사태를 규정했다. 따라서 두 글 모두 대중을 집회·시위의 ‘청정지대’에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이런 저널리즘적 문맥은 7건의 사태 어디에서나 예외가 없었는데, 크게 두 가지 범주 안에서 프레임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안보 프레임’이다. 안보 프레임 안에서는 폭력·혼란·불안 등이 현상을 설명하는 열쇳말로 동원됐고, 배후·음모론이 매번 제기됐다. 둘째, ‘국가경제·발전 프레임’이 예외 없이 등장했다. 두 프레임은 병렬 또는 혼용되는 대위적 변주를 되풀이했다. 여기에는 선동적 언어와 이미지, 자의적 통계 및 이에 대한 자의적 해석, 의도적 유비 논증 등이 활용되고 있었다. 집회·시위 참가자를 일반 시민과 분리해 시민을 탈정치화로 유인하려는 집요한 시도도 엿보였다. 정신병리적으로 보면 헌법 21조에 대한 심각한 인지 부조화다. 그러나 의도가 매우 뚜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복화술일 뿐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독립신문>은 어땠을까. 인민을 계몽하고 민족 독립의 의지를 고양한 언론이라는 게 이 신문에 대한 주류적 평가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독립신문>의 창간 주역 가운데 상당수가 훗날 일제에 부역하며 식민지 귀족의 삶을 살았던 사실 앞에서 머쓱해진다. 그들은 별안간 ‘변절’한 것일까. <독립신문> 발간 당시부터 그들에게서 내재적 일관성을 찾을 수는 없을까. <독립신문>의 자유주의 사상을 연구한 이나미는 이 신문의 정체성을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자유주의에서 찾는다.(20) <독립신문>에는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내용과 외세 의존적이고 민중 불신적인 내용이 상호 모순적으로 공존하는데,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의 분석 틀이 필요하다고 이나미는 말한다. 바로 그런 모순이 자유주의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복화술

<독립신문>은 참정권을 주창하되 결코 보통선거권까지 밀고 나아가는 법은 없었다. 특히 조선 백성은 민권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함부로 그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중추원 의관의 반을 독립협회가 뽑을 것을 요구하는 헌의6조를 채택해 왕권에 도전하면서도, 의병 활동 같은 민의 저항권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동학군을 비도로 몰아세우며 외국군을 불러들여서라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민족의 근성과 민중의 수준을 비하하며 대통령 직접선거 등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요구를 억압했던 군부독재 정권의 논리, 집회·시위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주류 언론의 논리를 <독립신문>의 민낯에서 발견하게 된다. <독립신문>이야말로 한국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었고, 이 지배 이데올로기는 주어가 은폐된 보통명사로 유구하게 자가증식과 번식을 거듭해왔던 셈이다.

한국의 근·현대 언론사(史)에서 주류 언론이 ‘독립’을 유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독립하지 못한 언론이 곧 언론사(社)의 위기는 아니었다. 주류 언론은 독립 대신 공모와 결탁을 통해 오히려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성채를 높고 굳게 쌓아올렸다. 진보적 언론인만이 권력과 사주에 맞서 ‘자유 언론’과 ‘독립 언론’을 표방했다.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과 1986년 <말>지 보도지침 폭로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기자들은 강제해직되고 직접적인 국가폭력을 당하면서도 언론인으로서 파르헤지아(Parrhesia·진실의 용기)를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사건조차 ‘언론 자유’, ‘자유주의 언론’에 관한 기본권 투쟁 성격을 넘어서지 못했다.

권리장전에 주어를 기입하라

언론인 김중배가 1991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그만두며 내뱉었던 “과거 언론 자유를 위협한 세력은 정치권력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원천적이며 영구적 권력인 자본이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최대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경고는 20년이 지난 지금, 이른바 진보 언론들에 대한 탄식으로 바뀌고 있다. 2010년 <경향신문>이 김용철 변호사의 신간 <삼성을 생각한다>와 관련한 김상봉 전남대 교수의 고정 칼럼을 통째로 들어낸 사건은 진보 언론을 자처하는 신문들까지 자본의 손아귀에 멱살 잡힌 현실을 웅변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치권력의 대타항으로만 국한해왔던 진보적 언론(인)의 인지적 임계점을 넘어선 사태로 보는 건 무리일까. 자본권력에 대한 진보 언론의 말수는 갈수록 침묵의 나선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현실 앞에서 말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언론 자유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언설은, 목도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중의적으로 들린다. 이면을 들여다보라. 지배 체제와의 관계에서 주류 언론에는 애초 위기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기(론)은 경제적 위기 돌파를 위해 정치권력과 공모하기 좋은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 일례가 바로 종합편성채널의 무더기 허가다. 자본의 지배력에 의해 작동하는 언론 생태계는 상업적 성공과 담론 및 헤게모니의 장악이라는, 근대 민주주의에서 상충하는 두 가지 사냥감을 한 번에 포획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태생적으로 불온했고,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언론 자유, 아니 언론 자유를 사칭하는 자유주의 언론을 어찌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답을 찾기에 앞서 우선 다음 물음을 대면해보자.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독점하는 자유주의와 명확한 단절을 상상할 수 있는가? 자유에서 자유주의를 제거할 수는 있는가? 그 이전에, 둘 사이의 경계를 정확히 긋는 것은 가능한가? 그것이 회의적이라면 우리의 문제 설정은 바뀌어야 한다. 자유를, 언론 자유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확장하고 평등화할 것인가? 그것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던져지지 않은 물음을 이제라도 던지는 일이며, 권리장전에 비로소 주어를 기입하는 일이다. ‘누구의 자유,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라는 물음을 구체적으로 던지지 않는 한 본질적 위기는 여전히 은폐될 수밖에 없고, 진보를 자임하는 언론(인)도 그 공모에 가담하는 것과 다름없다.

글•안영춘 editor@ilemonde.com

<각주>
(1) 각각 2008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사설과 <중앙일보> 기사 제목.
(2) 웬디 브라운,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김상운 등 옮김, 난장, p.85, 2010.
(3) 웬디 브라운, 위의 책, p.96.
(4)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나가란 말이야”, <오마이뉴스>, 2001년 4월 23일,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37225.
(5) ‘소년 ‘범생이’에서 진짜 ‘기자’로’, <미디어스> 2008년 7월 3일,
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73.
(6) ‘‘여명작전 엠바고’ 4박5일간의 뒷얘기’, <인터넷한겨레> 2011년 1월 27일,
http://defence21.hani.co.kr/4594.
(7) ‘청와대까지 팔 걷고 언론 보복’, <미디어오늘> 인터넷판 2011년 1월 25일,
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465.
(8)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p.105, 2003.
(9) 1644년 존 밀턴이 발간한 팸플릿 제목. 그리스의 고등법정 ‘아레오파구스’에서 따왔다. <아레오파지티카>, 임상원 옮김, 나남출판, 1998.
(10)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병훈 옮김, 책세상, 2005.
(11) 이나미, 위의 책, p.106에서 재인용.
(12) 이나미, 위의 책, pp.107~108에서 재인용.
(13)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경 없는 기자회’(RSF)의 2009년 ‘세계 언론 자유 지수’ 조사에서 조사 대상 국가 175개국 가운데 20위에 올랐다. 조지 부시 정권 시절인 2008년에는 36위였다. 한국은 같은 기간 47위에서 69위로 하락했다. <한겨레>, 2009년 10월 21일자.
(14) 언론을 ‘제4부’라고 처음 표현한 이는 18세기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였다.
(15) 이나미, 위의 책, p.108.
(16) 2000년 선거에서 앨 고어 후보는 조지 부시 후보보다 전국 득표에서 2%가량 앞섰지만, 이런 제도 때문에 결국 패배했다.
(17) 필리프 리비에르, ‘표현 자유의 숨은 적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월호.
(18) 안영춘, ‘살아 있는 유물, 집회·시위 보도의 문법’, <연세 공공거버넌스와 법>, 제1권 제2호, 연세대 법학연구원, 2010년 8월을 참조할 것.
(19) 대한제국 말기 조선총독부가 영국인 E. T. 베셀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를 강제로 사들여 발행한 신문. 1910년 8월 28일까지 제호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한일병탄 다음날부터 <매일신보>로 바꾸었다.
(20) 이나미, 위의 책, pp.4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