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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녹색’이 만들어낸 ‘녹색의 사막’

<인터넷한겨레> ‘훅’에 쓴 글입니다.



1. 환유와 장자몽

직유나 은유가 실체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철저한 이원론이라면, 환유는 오히려 일원론에 가깝다. 직유와 은유는 이들의 관계에 우와 열의 위상차를 부여하지만, 환유에서 둘은 동격이다. 정신분석학이 한갓 은유의 서사라면 간밤의 생생한 꿈은 내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지몽은 뭐란 말인가. 굳이 욕망과 억압의 관계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꿈과 현실은 투사이거나 조응으로서 환유다. 환유는 비유법을 넘어서, 장자몽처럼 서로 뒤챈다. 얼마 전 나는 그것을 낙동강에서 새삼 깨달았다.

 2. 녹색이 녹색을 죽이는 이치

지율 스님은 먼 곳을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스님의 손끝이 멀리 뉘엿해지는 햇살 아래 강을 건너갔다. 방천 뒤로 펼쳐진 수풀은 조신했지만, 유독 주변의 다른 녹색을 압도하는 진녹의 식물이 넓은 권역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가을빛이 눈에 띄게 스미지는 않은 때였기에 조락의 속도 차이 탓으로 볼 수는 없었다. 멀리서 보기에 때깔부터 다른 그 식물은 아래쪽을 가득 뒤덮은 채 위쪽으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기세를 하고 있었다. 고요한 풍경화의 원경 속에서 홀로 꿈틀대는 형상이었다.

다른 식물들이 스미는 녹색이라면 그 식물은 튕기는 녹색이었다. 젊음을 거침없이 뽐내는 본새가 녹색을 생명에 빗대어 찬미하고 싶은 서정을 자극했다. 그러나 스님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가시박이라는 겁니다.” 거친 이름이었다. 줄기에 촘촘히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다고 했다. “강가를 다 뒤덮고 있어요. 앞으로 돌아볼 강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스님이 이번에는 우리가 서 있는 이쪽 강변길 아래를 가리켰다. “바로 이겁니다.” 얼핏 칡넝쿨처럼 보이는 덩굴식물이 발치 아래로 넉살좋게 뻗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것과 가까이 보는 것은 달랐다. 그것은 홀로 자라는 게 아니었다. 다른 식물을 그악하게 타고 올라 덮어씌우고, 뻗치는 제 힘에 겨운 듯 마침내 진액처럼 흘러내렸다. 가시박 넝쿨손 장막에 가려 자신의 하늘과 햇빛을 잃은 식물들은 더는 살 수가 없다고 했다. 기세가 무서웠다. 머잖아 다른 녹색을 절멸시킬 것이었다. 무서운 녹색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때 ‘녹색 성장’이라는 낯선 조어에 아찔하게 갈피를 잃던 찰나가 있었다. 녹색의 수사는 요란했었다. 녹색이 녹색을 죽이는 이치가 거기에 있었다.

3. 강 너머로 뻗는 토건자본의 탐욕

경북 구미시 지산들. 가을 들녘은 고즈넉했고, 4대강 살리기 시범사업 지역인 낙동강 27공구 둔치는 닥닥 긁은 솥바닥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 위에서 여러 대의 불도저와 덤프트럭이 흙놀이에 빠진 아이처럼 흙인지 모래인지를 푸고, 쓸어 담고, 나르고 있었다. 흙놀이에 빠진 아이는 무구할지 몰라도, 그것은 맹목적이었다. 둔치는 불모의 사막이 되어 있었다. 굉음이 울리기 전에는 지역 주민들이 밭을 부쳐 먹던 곳이었고, 어느덧 흔적조차 사라진 하중도(河中島)에는 습지가 잘 발달해 있었다고 한다. 애써 불모지로 만든 그곳에 지금은 날품 일꾼들이 다시 애써 잔디를 심고 있었다. 방천에는 가시박이 무성했다. 

공사 조감도에는 이 한갓진 곳에 축구장 10개 등 체육시설 13개가 들어서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 누가 이곳까지 와서 공을 찰까 싶고, 이미 구미시내 낙동강 둔치에도 텅 빈 축구장이 여럿 있지만, 구미시는 삽질이 끝나고 나면 인구가 40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단다. 축구장만 지으면 외부에서 인구가 대거 유입될 리도 없고 구미시민들이 갑자기 정염에 빠져 출산율이 폭등할 리도 만무할 텐데, 이 돼지셈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 

방천 너머 들녘을 가리고 있는 조야한 함석 울타리 위에 현수막이 펄럭였다. ‘최고의 체육시설과 공원을 굽어보는 곳, 투자가치 최고!’ 아파트 분양 광고였다. 아파트는 들녘이 아니면 들어설 자리가 없다. 4대강 사업은 토건자본이 강에서 벌어먹도록 하기 위한 기획이라는 생각은 순진했다. 토건자본은 강보다 훨씬 너른 강의 배후지를 탐내고 있다. 그것이야 말로 이 무모한 파괴의 궁극적 목표다. 수만 년 동안 강이 닦아놓은 기름진 충적토는 머잖아 콘크리트로 뒤덮인 택지나 위락시설로 바뀔 것이다. 

인공위성을 타고 한반도 상공으로 가보자. 남녘의 큰 물줄기라는 물줄기에서는 빠짐없이 토목공사가 동시다발로 벌어지고, 공사판은 물줄기 주변으로 빠르게 번져간다. 가시박도 한반도 남쪽의 물줄기라는 물줄기에서 빠짐없이 번성하고, 녹색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들불처럼 번진다. 불과 2년 사이의 일이다. 한반도 남녘 전체에서 벌이는 토목 불장난은 녹색 성장의 눈속임으로 토건족에게 당장 눈 먼 돈을 안기겠지만, 유효수요는 애초 존재하지 않기에 거대한 공동화 현상이 불가피하다. 호박 생장 촉진을 위한 접붙이기용으로 수입한 가시박은 더는 타고 오를 식물이 없을 때까지 맹렬하게 번지지만, 다른 식물이 절멸하는 순간 함께 절멸한다. 

가시박도 생명이니 그 생식 작용도 생명 살리기라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4대강 사업이 생명 살리기 사업이라는 언설 또한 기막힌 환유가 된다. 뭇생명을 죽이며 사는 암세포 같은 생명일지라도.


 4. 메마른 습지에서 길을 잃다 

구미 ‘해평 습지’는 죽은 말(死語)이다. 진객 흑두루미를 불러들이던 그곳에 이제 습지는 없다. 가을해는 짧아,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사위가 이미 칠흑에 휩싸여 있었다. 그믐밤이었다. 불빛도, 표지판도, 위치를 견줄 지표도 없었지만, 지율 스님은 준설 현장으로 가는 작업로로 일행을 능숙하게 안내했다. 덤프트럭이 파놓은 바퀴골을 타고 넘을 때마다 승용차가 신음을 내뱉었다. 7m 깊이로 강바닥을 파 들어간 준설 현장은 가파르고 메마른 협곡의 인공 세트장일 뿐이었다. 습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온전할 때 와 본 적이 없기에, 애틋할 수는 없었다. 공사판의 낭자함이 다만 이물스러워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을 따름이었다. 들어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으면 됐을 것을, 상주로 가기 위해 마음이 바쁜 일행은 방향을 달리 잡았다. 이번에도 스님은 자신 있어 했다. 이미 여러 차례 왔었고, 마지막 다녀간 지도 얼마 되지 않은 터였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달랐다. 근면한 파괴는 날마다 길을 지우고 새로 내는 일이기도 했다. 가까이 보이는 민가 불빛을 지표 삼아 가는데 번번이 집채만 한 준설토 더미가 앞을 막았다. 수없이 급정거와 후진을 거듭했다. 

가시박은 격절의 분단선과 같다. 가시박이 자라는 곳으로는 짐승들이 오갈 수 없다고 한다. 잘못 들어갔다가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오도 가도 못하게 갇힌다는 것이다. 일행은 준설토로 쌓아 올린 무덤군에 순장되듯 갇혔다. 이대로 날밤을 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들 즈음, 전조등 불빛에 농로처럼 보이는 좁은 길이 희붐하게 비쳤다. 오가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라 길의 흔적이었다. 자전거와 경운기로 오갔을 그 길을 마을 사람들은 더는 오가지 않을 것이었다. 준설토 무덤군으로 변한 그곳에 더는 부쳐 먹을 논밭은 없다. 일행은 마침내 분단선을 뚫고 삶의 터전 쪽으로 빠져나왔다. 

5. 영원히 마지막이 될지 모를 풍경들 

이른 아침, 낙동강 제1경이라는 상주 경천대. 지율 스님 거처가 지척인 이곳에서 <야생초 편지>의 지은이 황대권 선생이 이끄는 ‘생명평화결사’ 일행과 만났다. 경천대에 올라 굽어본 낙동강 물줄기는 너른 은모래밭을 만곡으로 굽이돌아 흐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토건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원형의 강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저 푸른 강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화급히 인공호흡기를 대야 한다는 말의 빛깔은 속으로는 붉고 겉으로는 진하게 푸르렀다. 경천대 물돌이 왼쪽 너머로 멀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가시박 덤불도 먼 곳에서부터 덩굴을 뻗어오고 있었다. 

황대권 선생이 말했다. “가시박이 번성하는 것이 전형적인 ‘녹색 사막’ 현상입니다. 겉은 녹색이지만 생명이 살 수 없는 거죠.” 경천대 모래밭을 밀어 공원을 만들고 잔디를 입히는 것도 같은 이치일 터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래밭에서 강과 수풀을 향해 백 번 절을 했다. 한 번 절을 할 때마다 모래가 이마에 닿았고, 영영 마지막이 될지 모를 풍경이 눈앞을 오르내렸다. 이대로 간다면 저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지산들과 해평 습지의 지금 풍경이 경천대의 미래 풍경일 것이다. 마지막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황대권 선생 일행과 점심을 나누고 헤어진 지율 스님과 우리 일행은 예천 내성천과 회령포를 차례로 들렀다. 둘 다 낙동강 최상류 지역이자, 4대강 사업 구간이다. 중간 중간 차를 세우고 강으로 가 물속에 발을 담갔다. 발목을 겨우 적시는 강물은 모래톱의 생김대로 물결을 이루며 순하게 흘렀다. 뉘엿해지는 햇살이 자잘히 물비늘을 만들었고, 그 아래로 어린 물고기들이 떼지어 헤엄쳐 다녔다. 물 밖으로 나와 수풀 사이를 빠져나올 때마다 주변에 가시박이 보였다. 가시박은 이미 한반도 남쪽 식생의 최우점종이었다.

일주일 뒤 지율 스님의 트위터에 경천대 공사 현장 사진이 올랐다. 가시박은 하루에 30cm씩 자란다고 했다. 

 
6. 가시박은 별안간 죽는다 

공사 현장 사진이 올라온 며칠 뒤, 이번에는 돌무더기 사진이 올라왔다. 시공사 쪽에서 공사 도중 나온 돌을 경천대 모래밭 한구석에 쌓아놓았는데, 스님이 그 돌무더기에서 찾아낸 장방형 돌들이었다. 마치 규격을 맞춘 듯한 그것들은 사람의 손길을 탄 것임에 틀림없었다. 오래된 매장 문화재일 가능성이 크다. 스님의 거센 요구로 공사는 잠시 중단된 상태다. 스님과 그 돌들의 만남은 숫제 우연일까. 경천대의 본디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야트막하게 차오르던 즈음, 지율 스님이 전화를 해왔다. 가을 한파 사흘째인 27일이었다. 드물게 밝은 목소리였다. 

“가시박이 모두 녹아버렸어요.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급강하면서 간밤에 첫 무서리가 내렸다고 했다. 다음날 스님이 전자우편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정말이었다. 녹았다고 해야 옳다. 위로 뻗치는 힘에 넘쳐 흘러내리면서도 그악함을 잃지 않던 가시박이 거죽만 남은 들짐승 주검처럼 누렇게 내려앉아 있었다. 답장을 썼다. “스님, 사진을 보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악한 힘일수록 순식간에 허망하게 스러지는 이치를 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싶게, 무서리 한 번에 가시박이 녹았다. 가시박은 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사람의 이름과 발음 일부가 비슷하다. 녹아내린 가시박은 의인화를 넘어 무언가의 앞날을 뚜렷이 예지하는지도 모른다. 이번 마감이 끝나면 다시 그 환유의 현장으로 달려가야겠다.

 사진 : 지율스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