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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웃어야 산다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2010년 송년호 ‘시론’으로 쓴 글입니다.
2010년을 보내고 2011년을 맞는 것과 관련해 글을, 그것도 ‘시론’이라는 문패로 써달라는 요청은 난감했다.
주례사의 심정도 이와 비슷하리라!


시인 김수영은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라고 읊었다(<누이야 장하고나! - 신귀거래 7>).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한 지 석 달 뒤였다. 누구보다 4·19 혁명을 예찬했던 김수영에게 5·16은 믿기 어려운 참극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략 10년 뒤, 시인 김지하는 이 시구를 빗대어 “누이야 풍자냐 자살이냐”라고 썼다. 박정희의 폭압 정치가 극을 향해 내달릴 때였다. 두 시인 모두에게 ‘풍자’는 현실의 고통을 승화하는 기제였다.

풍자는 ‘비유’라는 표현 양식을 통해 ‘웃음’이라는 사회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비유하는 자의 꼿꼿함으로 정치성을 획득하지만, 한편 상대에 대한 힘의 열위(劣位)를 드러내 자신을 허허롭게 타자화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풍자는 전능할 수 없다. 풍자는 약자의 가녀린 무기이며, 그 힘이 다한 지점에서 새로운 양식의 결단이 요구된다. 김수영은 해탈로, 김지하는 자살로, 재승화 혹은 탈주를 꿈꿨다.

해마다 연말이면 <교수신문>이라는 매체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한다. 대학 교수들에게 몇 개의 사자성어를 제시하고, 그 해 한국 사회를 빗대기에 가장 맞춤한 것을 고르게 해서 정한다. 올해는 ‘장두노미(藏頭露尾)’가 선정됐다. 타조가 몸을 숨기려고 머리를 덤불 속에 처박지만 정작 꼬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학 교수들은 올 한 해를 권력이 진실을 은폐하려고 온갖 거짓을 둘러댔지만 그럴수록 그 진실이 외설적으로 드러났던 시간으로 본 것 같다.

풍자는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지만 풍자의 영토는 뜻밖에 좁다. 자신이 약자임을 드러내되 꼿꼿함을 잃지 않은 채 스스로 타자화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금을 넘게 되고, 금을 넘으면 자신이 희화화되고 만다. 초등학교 무상급식을 두고 서울시장이 4억 원을 들여 냈다는 최근의 신문 광고를 보라.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라며 자기만의 성전을 치르던 그는 마침내 다섯 살배기 아이를 발가벗겨 세상에 전시했다. 그는 풍자한다고 믿었을 테지만, 곧장 누리꾼들의 패러디 대상이 됐다. 그는 스스로 타조가 되고 말았다.

‘다사다난’이라는 말은 진부하다. 2010년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전쟁의 공포를 가장 뚜렷이 기억하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 공포는 전쟁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오기도 했지만, 한국 사회에 호전주의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깨달음에서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살벌한 공기 속에서도 웃음은 출현한다. 한반도 남쪽의 군대는 비장하게 포격 훈련을 감행했다. 북쪽은 간단히 외면했다. 풍자의 주체와 희화화의 타자가 가느다란 금 위에서 순간 선명하게 갈렸다. “어쨌든 우리가 이겼다.” 남은 건 아큐의 ‘정신 승리법’뿐이다.

물론 전쟁은 풍자로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난 한 해 전쟁 아닌 것이 얼마나 있었던가. 전국의 노동현장에서, 4대강 전역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시인들처럼 해탈이나 자살을 꿈꿀 것인가. 글쎄다. 또 돌이켜보자. 6월 지방선거와 11월 기륭전자 1895일 파업 타결은 어떤가. 그러니 2011년을 예단하는 건 섣부르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절망하기엔 언제나 너무 이른 낙관주의의 역설 위에 서 있다. 이럴 때일수록 웃음은 힘이 된다. 내년에도 웃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