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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사진의 거짓말이 더 교묘하고 지독하다

찰나의 시각적 사실이 맥락적 진실로 둔갑…문자 텍스트보다 더 주의깊게 살펴야

거짓말 가운데 가장 엉터리없는 거짓말은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른바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다. 이 말은 발화자의 언표는 물론 그의 진정성까지 싸잡아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그럴싸한 거짓말 가운데는 어느 쪽이 ‘진짜 거짓말’에 더 가까울까? ‘사기꾼치고 멀쩡하게 생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범죄학의 정언명제가 그 답이다. 참말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거짓말만큼 ‘거짓의 신뢰도’를 확실히 보장하는 거짓말은 없다.

저널리즘은 자신의 정보가 모두 ‘사실’에 입각한 참말임을 믿게 만드는 정교한 장치들을 총동원해 화술을 펼친다. (저널리즘이 곧 거짓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객관주의는 가장 대표적인 장치다. 그리고 사진(또는 영상)은 그 객관주의 계보학의 적자다. 사진은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는 통념에 기대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문자 텍스트의 신뢰도까지 끌어올린다. 미술 사조에서는 인상주의 이후 시각의 상대성과 주관성이 강조돼왔지만, 저널리즘은 오히려 그 반대로 나아갔다.

물론 ‘사진 조작’이 종종 말썽을 일으키고 있고, ‘뽀샵’은 저널리즘에서도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다. 그러나 사진의 한계(또는 결함)는 이런 ‘기술적 일탈’에 있지 않다. 저널리즘에서 사진이 전달하는 것은 정작 그 찰나의 시각적 사실이 아니다. 피사체는 주관적으로 낙점되고, 프레임과 앵글도 주관적으로 선택된다. 그것은 사진의 태생적 한계이지만, 저널리즘 처지에서는 신묘한 요술방망이기도 하다. 찰나의 시각적 사실은 맥락의 타당성과 상관없이 진실을 내포한 전체의 사실로 비치게 된다.


최근 현직 국회의원 2명이 국회 내 폭력 사태와 관련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상임위 위원장이 ‘사전 질서 유지권’을 발동해 회의장 출입을 막은 것에 항의해 회의장 문을 부수고 명패를 집어던진 행위에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선고일 당일 발행된 석간신문에는 해당 국회의원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모습이 사진으로 실렸고, ‘고개 숙인 국회폭력…’이라는 제목이 따라붙었다. 이것만 보면 영락없이 법원의 추상같은 처벌을 받은 금배지의 초라한 모습이다.

그러나 꼼꼼히 뜯어보면 해당 국회의원은 법원 청사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무릎 아래는 트리밍을 해서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쳐들고 계단을 내딛는 사람은 없다는 걸 이 신문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문은 이 사진과 함께 ‘법원이 국회 폭력을 엄단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건 집기를 파손한 행위였을 뿐, 법원은 애초 국회의원의 회의장 출입을 막은 것이 불법이었다고 판결했다. 이쯤 되면 신문은 거짓의 지뢰밭이다. 발끝을 조심하지 않으면 터진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64호(2009-11-30)에 실린 글입니다.